원래 ‘여사울’이란 말은 ‘~과 같다’, ‘~과 비슷하다’는 의미의 ‘여(如)’자가 ‘서울’이란 단어 앞에 붙여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如서울]”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여사울이 속한 충청남도 서북부 지방은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넓은 내포평야가 펼쳐져 있고, 강과 바다의 물길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곳곳에 포구(浦口)가 발달한 상업유통의 중심지였으며, 충청도,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서울 도성으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업과 상업으로 부(富)를 획득한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여사울’과 같은 명칭이 생겨날 수 있었다.
여사울은 충청도 지방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여 ‘내포(內浦)의 사도(使徒)’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이 태어난 곳이자 그가 천주교 전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곳이다. 이존창은 기호남인(畿湖南人) 녹암계(鹿菴系)의 좌장인 양근 고을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의 제자로서, 스승과 그 동생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1785년경 서울 명례방 공동체에서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후, 고향 여사울로 돌아갔다. 여사울은 30여호, 300여명이 넘는 동네로,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이존창의 전교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으며, 차츰 전교의 범위를 넓혀 예산을 포함한 내포지방 전체로 교세를 확장시켜 갔다. 그 결과 1791년 신해박해 때 이존창은 호서(湖西) 지방 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되어 관가에 체포되었는데, 배교를 하여 석방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향 여사울을 떠나 충청도 홍산(鴻山)을 거쳐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후 여사울 신앙공동체는 이존창이 입교시킨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 부자에 의해 유지되어갔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이존창, 김광옥 등이 순교하고 김희성이 경상도로 이주해간 후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방 신부의 은신처를 제공해준 순교성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17981840) ·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18011840) 등이 신앙생활을 하는 등 신앙의 맥이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1984년 대전교구 신례원(新禮院)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여사울 이존창의 생가터를 찾아 십자고상과 성모상 등 천주교 유품을 발굴했으며, 1987년 1월 생가터 축복식을 갖고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사적지로 조성했다. 2008년 1월, 대전교구는 여사울 공소를 신례원 본당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여사울 본당 겸 성지’로 설립하고, 장동준 라파엘 신부를 초대 주임사제로 파견했다. 2008년 12월 충청남도는 여사울이존창생가터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이후 대전교구는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했다. 순교자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여사울 지역은 충청도 천주교회의 출발점이자 초창기 교회의 중심지였으며, 이존창의 집안에서 박해시대 한국 천주교회의 두 방인사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가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 사제성소의 못자리로도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