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紅巾賊)이 제2차 침략을 단행하여 개경이 함락당하자 공민왕은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하였다. 1362년 정월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개경을 수복하고 홍건적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하지만 삼원수(三元帥) 즉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왕명을 위조한 김용(金鏞)의 간계에 속아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을 죽였다가 왕명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1363년(공민왕 12) 공민왕은 복주에서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흥왕사에 머물렀다. 그 해 윤3월 신미(辛未)일 초하루 밤에 김수(金守)·조련(曹連) 등 50여명이 행궁(行宮)인 흥왕사에 돌입해 변란을 일으켰다. 이때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禹磾),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상호군(上護軍) 김장수(金長壽) 등이 개경으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흥왕사 행궁으로 달려와 진압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윤3월 을유일(15일)에 책봉된 공신이 흥왕공신(興王功臣)이며 일명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이라고도 한다. 흥왕공신은 1등공신과 2등공신으로 구별되었다. 1등공신은 삼사우사(三司右使) 이성서(李成瑞), 지도첨의 안우경(安遇慶), 밀직사 최영(崔瑩), 밀직부사 우제(禹磾)·한휘(韓暉), 개성윤(開城尹) 양백익(梁伯益),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吳仁澤),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문예부 사윤(司尹)인 김서(金湑), 우부대언(右副代言) 유계조(柳繼祖), 상호군 양백연(楊伯淵)·김유(金庾),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김지서(金之瑞),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이춘영(李春英), 사재령(司宰令) 이분(李芬), 호군(護軍) 이용길(李龍吉)이었다. 2등공신은 판도판서 최용우(崔龍雨),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양(李陽), 대호군 권희(權禧)·이득림(李得霖) 등이었다.
흥왕사의 변란에 대해『고려사(高麗史)』등에서는 김용이 원나라의 사주를 받아 공민왕을 살해하기 위해 정변을 기획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과연 그러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흥왕사 변란을 진압해 공신에 책봉된 인물들이 이후 권력자로 떠오르는 점은 공민왕대 정치사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안우경, 최영, 우제(禹磾), 한휘(韓暉), 양백익, 오인택, 김한진, 유계조 등은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에도 책봉되어 그러한 측면을 뒷받침한다. 특히 최영은 1364년 원에 의해 고려 국왕에 옹립된 덕흥군(德興君: 공민왕의 숙부)의 침략까지 물리쳐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왕권 유지에 부담을 느낀 공민왕이 흥왕공신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신돈을 등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