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미상. 정성(鄭珹)은 학록(學錄) 벼슬을 거쳤으며 최항집권기에 고향 하동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하동(河東) 감무(監務) 노성(盧成)이 그 고을 사람 이규(李珪)·이창(李昌)과 결의 형제가 되어 합주부사(陜州副使) 설인검(薛仁儉), 남해현령(南海縣令) 정고(鄭皐), 급제 유여해(兪汝諧), 중 명취(明就) 등을 불러모아 문을 잠그고 “어진 선비는 가슴 치며 슬퍼하는 날이며, 영계 새끼들은 득의해서 노래 부르는 때로다”라는 시를 주고받으면서 국정을 비방하였다.
정성은 이러한 비방을 최항에게 무고하였다. 최항이 대노하여 노성·이규·이창을 목 베어 죽이고 설인검, 정고 등을 섬으로 유배보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때의 사람들이 정성을 사람 잡아먹는 놈(食人者)이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정성의 무고사건은 최항정권에 대한 반감이 지방의 관리와 지식인층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반증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