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출신지 미상. 원종 때 좌부승선(左副承宣)을 역임했다. 1269년(원종 10) 무신집권자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세울 때 원종을 궁궐에서 내쫓으니 시종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이창경(李昌慶)은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원종에게 바쳤다. 또한 자기 하인 5명을 시켜 왕과 왕비를 시종케 하여 별궁(別宮)으로 옮겨 두었다가 얼마 안 가서 김애(金皚: 金俊 後妻의 아들)의 옛집으로 옮겼다. 안경공 왕창이 즉위하자 우복야(右僕射)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 원종이 다시 복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았다.
1271년(원종 12)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다. 같은 해 6월, 세자 왕심(王諶: 忠烈王)이 몽고에 볼모로 갈 때 행차를 호위하였다. 그해 10월에 몽고 황제가 세자의 혼인을 허락하였다는 소식을 가지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해 11월에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신정을 축하하고 세자의 혼인을 허락한 것에 대하여 사례하였다. 아울러 김통정(金通精)을 수반으로 하는 제주도의 삼별초(三別抄) 무리가 장차 다시 육지로 나올 것이 염려되니 섬멸해주기를 청하였다. 한편, 몽고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고려에서 몽고로 도망친 고려인들을 모두 보내주기를 청원하였다.
충렬왕 때 왕의 총애를 잃어버린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제안공(齊安公) 왕숙(王淑)과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 이분희(李汾禧) 등 43명이 반역을 꾀하여 다시 강화도에 들어가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이창경은 국문을 받고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무죄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