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충렬왕이 본래 임비(林庇)에게 회진(會津)을 본관으로 내렸으나 회진이 나주에 속했으므로 본관을 나주로 바꾸었다. 이런 연유로 나주임씨(羅州林氏)는 임비를 시조로 하지 않고 원조로 삼고 있다.
원종 때 장군으로서 세자 왕심(王諶, 훗날의 충렬왕)이 몽고에 입조할 때 호위하였다. 1269년(원종 10) 고려로 귀국할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 국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세자를 모시고 몽고의 연경(燕京: 현 北京 일대)에 머물렀다. 그 당시 세자를 호종하였던 공로를 인정받아 1282년(충렬왕 8)에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영통사(靈通寺)의 중 홍탄(洪坦)이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장군 임비가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한 유경(柳璥), 상장군(上將軍) 한희유(韓希愈), 장군 양공적(梁公勣) 등과 함께 음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순마소(巡馬所)에서 국문받았다. 이후 홍탄의 무고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명을 받아 남경사록(南京司錄) 이익방(李益邦)과 남경부사(南京副使) 최자수(崔資壽)를 붙잡아 문초하였다. 당시 조인규(趙仁規)가 휘하의 군졸 개삼(介三)을 시켜 남경의 백성 8명을 유인하여 달호(獺戶)로 삼았는데 이후 세금 납부를 피하려는 백성들이 달호가 되어 제국대장공주의 궁에 수달가죽을 바쳤고, 조인규는 그의 반을 차지하였다. 남경사록 이익방이 이를 문제 삼아 개삼을 가두자 조인규가 공주에게 호소하였고, 임비가 국문을 담당하였다. 임비는 모든 사실을 파악하여 공주에게 보고하고, 달호가 되었던 백성들을 원래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1289년(충렬왕 15) 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가 되어 원나라 개주(盖州)로 정해진 군량을 기한 내에 수송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철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