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미상. 출신지는 정주(靜州). 정오부(丁伍孚)라고도 한다. 고려무인정권기 말엽 관노(官奴)로서 국왕 원종의 복위에 크게 공헌하였다.
1269년(원종 10) 6월 18일(辛卯) 임연(林衍)은 원종의 명령을 받고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환관 김경(金鏡)과 최은(崔王恩)을 제거한 다음, 21일(乙未)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였다. 같은 해 7월 7일(辛亥) 임연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여필(郭汝弼)을 몽고에 보내 「진왕손위표(進王遜位表)」를 올려 원종이 왕위를 양위했음을 알리게 하였다. 같은 달 23일(丁卯) 세자 왕심(王諶, 훗날 충렬왕)이 연경(燕京, 元의 大都)으로부터 돌아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다.
이때 정주의 관노 정오부가 목숨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 세자에게 임연이 원종을 폐위시킨 사실을 알렸다. 아울러 임연이 야별초(夜別抄) 20인을 국경지대에 매복시켜 세자를 포박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정오부가 말한 내용이 사실인지를 곽여필을 붙잡아 확인한 세자는 다시 원나라 수도로 돌아가 그대로 원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정오부가 임연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세자로 하여금 대응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11월 21일(壬戌)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원종의 복위가 결정되었다. 같은 달 23일(甲子) 몽고 사신 흑적(黑的)의 입회 하에 원종이 복위하고 안경공 왕창은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이로써 원종은 왕권을 회복하였으며 임연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채 얼마 후 등창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정오부는 원종 복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군에 임명되었다.
원나라에서 충렬왕을 시종한 공으로 1282년(충렬왕 8) 5월에 수종공신(隨從功臣)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정오부 등을 포상한 수종공신 제도는 이때 처음으로 제정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