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 일원 ( )

김제 금산사
김제 금산사
인문지리
유적
문화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창건된 금산사의 사찰일원. 사적.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창건된 금산사의 사찰일원. 사적.
개설

200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제시에 위치하고 있는 모악산(母岳山, 해발794m)의 서쪽 기슭에 건립되어 있는 사찰이다. 모악산은 산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가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모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모악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고찰이다.

금산사는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도량이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매우 큰 규모로 유지되어 온 사찰로서 부속된 암자가 40여개에 이르는 대찰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정유재란 때는 건물이 완전히 전소되는 화를 입기도 한 사찰이다.

역사적 변천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금산사는 백제시대 법왕(599∼600)이 즉위한 다음 해에 칙령으로 금산사를 개창하고 승려 38명을 출가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절에 보관된 문헌이 모두 불타 없어진 후 「금산사사적」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졌다. 이 때문에 「금산사사적」에 전하는 금산사에 관한 기록은 그 이전의 내용이 매우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따라서 창건에 관한 자세한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서기 600년 경금산사가 창건되었다고 하는 때는 미륵신앙이 매우 성행한 시기여서, 백제법왕은 왕흥사를 창건하였고, 왕위를 이은 무왕은 오늘날의 익산에 국가적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백제시대 말기에 번창한 미륵신앙이 바탕이 되어 금산사가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신앙을 크게 융성시켰으며, 고려시대에 금산사는 진표의 계법이 전수된 동화사, 속리사 등과 함께 법상종의 중요 사찰 역할을 하게 된다. 금산사는 혜덕왕사소현(韶顯, 1038∼1095)에 의해 큰 가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소현은 금산사를 대사(大寺)·봉천원(奉天院)·광교원(廣敎院)의 세 구역으로 구분하여 다수의 전각을 세웠다. 고려 후기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아래 있을 때 금산사는 원명대사해원(海圓)에 의해 다시 중창된다.

조선시대 선조 조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은 승병을 조직하고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전투에 적극 임했는데, 이 때 금산사는 호남지역 승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승군은 의승병 1천명을 모아 왜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문에 정유재란이 일어 안 후 금산사의 모든 건물과 산내에 위치한 40여 암자가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금산사는 왜란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재건되었다. 1601년(선조43)부터 1635년(인조13)까지 수문대사(守文大師)에 의해 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대규모의 사찰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층 목조건물인 미륵전이 다시 건립되고 미륵삼존상도 재 조성되었다. 또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여 5불6보살과 오백나한을 함께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도 건립되었다. 이후에도 금산사에는 수차례의 화재와 훼손이 있었다. 1930년 미륵본존상이 크게 훼손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고, 1993년에는 미륵전의 해체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며, 대적광전은 1986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94년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금산사에는 많은 전각과 탑이 오랜 세월동안 그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다수가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내용 및 특징

금산사의 상징은 3층으로 된 목조건물인 미륵전이다. 미륵전에는 층별로 편액이 걸려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이라고 쓴 액자가 붙어 있다. 미륵은 마이트레야(Maytreya)로 우애를 뜻하며, 자비로운 보살(慈氏菩薩)을 의미한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하늘나라의 중생을 교화하고 있으며, 먼 훗날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밑에서 도를 이룬 뒤 3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미륵전에 3단 편액은 이러한 미륵신앙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금산사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각과 석탑이 많다. 미륵전(국보, 1962년 지정), 대장전(보물, 1985년 지정), 대적광전 증의 주요 전각을 비롯해 금산사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금강계단(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노주(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 석련대(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혜덕왕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금산사석등(보물, 1985년 지정), 금산사심원암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등 다수의 문화재가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지정문화재들이 금산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금산사가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를 지나오면서 계속 중창되며 중요한 사찰로 존속되었음은 물론 오랜 세월동안 다수의 유물들이 옛 모습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오고 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금산사에는 특이한 조형성을 갖고 있는 유물이 많다. 사찰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당간지주는 기단부와 화강암 간대(竿臺)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산이다. 3층의 목조 건물인 미륵전은 한옥건물의 전통적 구조를 보여주는 매우 의미가 큰 전각이며, 매우 특별한 조형성을 나타내는 오층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진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이다.

연꽃무니로 조각된 석련대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이며, 노주(露柱)는 석조대좌 위에 보주모양으로 장식을 한 돌기둥으로 역시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다. 육각다층석탑은 검은 색의 점판암으로 된 육각형의 옥개석이 11층을 이루고 있는데 현재 10층과 11층만 탑신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석조물들은 고려 전기에 소현이 절을 크게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금산사가 법상종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사적)』(문화재청, 2010)
『삼국유사』(일연/김원중 역, 민음사, 2008)
금산사(www.geumsansa.org)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김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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