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흥국사 영산전에 봉안된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16나한상으로, 국가유산 조사과정 중에 발원문과 바닥면 묵서 기록을 통해 1650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조성시기는 1650년보다 빠른 조선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2011년 3월 소조석가삼존불좌상만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소조석가삼존불좌상을 포함한 모든 존상들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흥국사 영산전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고 16나한상, 제석천상, 사자상 2구, 인왕상 1구 등의 권속상들은 남양주시립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존상들 가운데 석가여래상과 제1빈두로발라타사존자상(第一賓頭盧跋羅墮闍尊者像), 제15아씨다존자상(第十五阿氏多尊者像) 내부에서 발원문을 포함하여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유물 물목은 석가여래상에 1650년 발원문과 후령통, 사리 · 오색사 · 쇠못(후령통 내부 납입),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다라니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1존자상에는 1892년 원문 1매, 제15존자상은 후령통,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다라니 등이 있었다. 석가여래상 발원문에는 1650년 8월 조성 기록과 발원 목적 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제1존자상 발원문에는 1892년에 16성상을 전라도 고산(高山) 안심사(安心寺) 약사암(藥師庵)에서 흥국사로 이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16나한상의 경우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안심사에서 이안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석천상과 제10반탁가존자상(第十半託迦尊者像)의 바닥면에서도 중수와 관련된 묵서가 발견되었다. 이 묵서명을 통해 1650년에 중수되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데 당시 참여했던 서희(瑞熙), 상민(尙敏), 조능(祖能), 성일(性日) 등의 화원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수화원 서희는 17세기에 제작한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러나 상민은 혜희의 차화승으로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1655)과 갑사 보장전 목조불좌상을 제작하였으며 조능은 우두머리 조각승으로서 김제 청룡사 목조관음보살좌상(1655, 원 봉안처 전주 봉서사), 함양 법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657) 등을 조성한 화원이다.
즉 이들 영산전 불상들은 1650년에 중수된 상으로, 원 봉안처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 안심사 약사암이며 1892년 왕실의 상궁들에 의해 현재의 봉안 사찰인 흥국사로 이안해 왔음이 확인된다. 흥국사는 1568년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지어 편액을 하사받았던 사찰로 이후 정조, 고종 등 꾸준하게 왕실의 후원을 입어 중수와 중건이 있었으며 19세기에 가장 많은 불사가 있었다.
석가여래삼존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에 턱이 좁은 갸름한 얼굴형, 상반신이 길고 무릎이 넓고 낮은 길쭉한 신체비례 등이 특징이다. 주존불인 석가여래상은 왼손은 배 부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 끝을 가지런히 둔 항마촉지인을 취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 없이 둥그스름한 타원형 중간계주만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눈 아래 광대뼈가 강조되었고 눈꼬리가 올라간 작은 눈, 작은 입 등을 표현하여 고요하고 침울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대의를 왼쪽 어깨 위에 살짝 걸치고 왼쪽 팔을 드러내었고 밋밋한 가슴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주름 잡힌 승각기가 보인다. 옷주름들은 간결하면서도 굴곡이 깊어 볼륨감이 있으며 흙의 재질적 특성으로 부드럽게 처리되었는데 특히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석가의 좌우측 보살상들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앉아 있는데 좌협시는 왼손을 가슴 부위에, 오른손을 배 부분에 두었고 우협시는 그 반대의 손 모습을 취하였다. 신체비례, 얼굴 표현 등은 본존불상과 유사하다. 정수리에 상투형 머리를 올렸으며 어깨 위의 머리카락은 생략되었다. 신체에는 화형 귀걸이, 수식이 세 줄 드리워진 목걸이, 간결한 팔찌 등을 착용하였다. 착의법은 편삼 위에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이나 옷주름 세부 표현에서는 역시 본존불상과 같다. 길쭉한 신체 비례와 낮은 무릎, 도드라지게 표현된 무릎 위 옷주름 등은 1458년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1993년 지정), 1482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되고 보살상의 상투표현과 어깨 위 머리카락의 생략 등은 16세기 보살상들의 특징적인 요소로 이 삼존상은 15~16세기에 조성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16나한상은 현재 표면을 짙게 채색한 상태로 1892년 흥국사로 이운하면서 다시 채색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한상들은 상반신이 길고 무릎이 낮은 길쭉한 비례에 마른 모습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은 표정이 다양하여 실재적인 특징을 보인다. 나한상들은 사자,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앉아 있거나 염주, 불자, 파초, 경책을 든 모습, 합장한 모습 등 독특하고 다채로운 자세와 지물을 표현하였다. 의자에 앉은 제석천상과 두루마리를 든 사자상, 칼을 쥔 인왕상 등은 규격이 작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나한상은 작은 얼굴과 길쭉한 신체비례에서 삼존상과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 불상들과 비교되며 턱이 좁은 갸름한 얼굴은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1501년. 보물, 1965년 지정)과 닮았다. 나한상의 제작시기는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양주 흥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16나한상은 15~16세기경에 조성되어 1650년에 중수된 중요한 불상이다. 즉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나한상 가운데 일괄로 조성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비교적 작품 수량이 적은 조선 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며 소조상이나 나한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