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월 2일부터 1월 3일까지『동아일보』에 발표되었다. ‘조선(朝鮮)이 가지고 싶은 문학(文學)’이라는 부제대로, 조선사회가 취해야 할 문학의 태도를 서술하는 글이다. 이 평론에 대해 양주동, 백기만, 성호, 양명 등 당대 문인들이 일련의 논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특별히 이광수는 양주동의 「철저(徹底)와 중용(中庸)」(『조선일보』1926.1.24)이라는 비판적 글에 대하여, 「양주동씨(梁柱東氏)의 〈철저와 중용〉을 읽고」(『동아일보』1926.1.27∼1.30)라는 글로써 반론하였다.
이광수의 글에 따르면, 무엇에나 ‘상(常)’과 ‘변(變)’이 있는 것처럼 ‘변’을 추구하는 예술과 ‘상’을 추구하는 예술이 존재한다. 이광수는 영국 고전주의 비평가 아널드(Matthew Arnold)를 원용하여 시대 의식을 첨단에서 반영하는 문학을 하나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평범한 인생과 자연에서 영원한 진리와 미를 찾는 문학을 높이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상적 문학(常的文學)’은 “항구성(恒久性)을 가진 문학(文學)”으로서, 만인에게 공통적인 일상생활과 거기서 나오는 희노애락을 제재로 한다. 그에 반해 ‘혁명적 문학(革命的文學)’은 처음에는 신기하나 이단이나 기형아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이광수가 혁명을 사회가 침체 상태에 있을 때 나타나는 일시적ㆍ병적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문학과 영문학이 가장 존중할 만한 문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문학과 영문학은 중용의 도를 지키며 상식적이고 평범하다. 지금의 조선인은 중병을 앓고 난 사람과도 같기에 “상적 문학, 정적 문학, 평범한 문학, 영문학적 문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중용과 철저」는 ‘상’과 ‘변’의 이원적 대립을 통해 ‘상’ 또는 ‘중용(中庸)’의 문학론을 피력하는 글이다. 이러한 논의는 1920년대 전반기의 예술 지상주의 내지 계급주의 문학의 투쟁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문사(文士)와 수양(修養)」(1921)에서 ‘인생을 위한 예술(arts for life's sake)’의 문학관을 밝혔듯이, 이광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정하고 문학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도덕적 교훈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광수는 당대 조선의 현실을 분열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 그에게 예술을 사회에 대립시키는 사고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계급주의적 노선은 사회적 통일성을 저해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광수는 ‘철저(徹底)’나 혁명의 ‘증오(憎惡)’, ‘쟁투(爭鬪)’ 등의 극단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중용’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중용과 철저」는 이데올로기 논쟁이라기보다는 계급주의 문학의 급진적인 혁명성이나 문학의 도구화를 비판하는 데 치중한 글이다. 실제로 이광수는 ‘혁명’이나 ‘혁명적 문학’을 원론적인 입장에서 수긍하면서도 그것의 ‘변’적 요소를 배제한다. 그에게 ‘상적 문학’이란 문학의 현실성보다는 영원성, ‘시대정신(時代精神)’보다는 시대를 초월한 문학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중용과 철저」는「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1922) 등에서 표명된 이광수의 탈정치적 논리가 문학론에서의 탈현실의 논리로 표명된 글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글이 문화적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1920년대부터 보수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던 이광수의 정신사적 궤적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광수가 주장한 ‘상적 문학’은 자신의 비역사적인 태도로 인해 1920년대 조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문학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