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는 ‘흑치상지’라는 영웅을 통해 일제에 대한 민족의 저항과 민족 부흥을 암시하는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백제 수도가 함락된 후, 잔악한 당병(唐兵)들에게 끌려가는 백제 유민의 수난을 서두에 삽입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긴 간신 임자(任子)와 일신을 위하여 당나라 장수에게 교태를 부리는 그의 정실 창화(昌花)가 여기에서 그려진다. 작가는 이러한 구성으로서 국가의 붕괴에 따르는 민족의 억압 상황과 공동체 구성원의 타락을 나타내고 있다.
흑치상지는 이러한 상황에 개입하여 당병들을 물리치고, 창화 부인을 죽이려는 유민들을 말려 공동체의 갈등을 수습한다. 이후 흑치상지는 사타상여(沙吒相如), 지수신(遲受信) 등의 장수들과 함께 임존성(任存城)에서 병사와 군비를 갖추어 당병과의 싸움에 대비한다.
창화 부인은 흑치상지에게 감화되어 당병의 스파이 노릇을 자처하게 되고, 흑치상지의 군대는 그녀의 도움으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작품은 창화 부인이 액자 형식으로 된 자신의 과거를 흑치상지에게 들려주는 부분에서 중단되고 있다. 그 내용은 창화 부인이 연인 수진과의 혼인을 이루지 못하고 강제로 임자의 아내가 되어 타락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흑치상지』는 민족의 붕괴와 재건 노력을 통하여 식민화된 현실에 저항하려는 현진건의 의도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때 현진건이 선택한 백제사는 식민지 현실에서 훼손된 민족 정체성의 회복 가능성을 보존하는 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흑치상지는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는 공동체의 중심인 동시에, 민중들의 국권 회복 의지를 대변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창화 부인이 흑치상지의 인품에 반하여 요부의 이미지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게 되는 과정도 흑치상지가 지닌 민족 구원의 영웅상을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또한 작가는 의도적으로 백제 멸망에 대한 원한을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만 돌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어긋나지만, 국가 붕괴의 원인이 분열된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여 민족적 화합을 내세우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역사적 인물인 흑치상지를 통해 민족주의 이념과 국권 회복 의지를 고취하려는 역사소설이다. 그런 까닭에 흔히「흑치상지」는 20세기 초반 역사ㆍ전기 문학이 익숙하게 재현하는 구국 영웅의 계보에 속한다고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