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의 연구를 토대로 조선적인 유화의 창작에 그 목적을 두고 1929년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사무실을 동경에 두고, 대표로 임학선과 김용준을 선출했다. 1930년 4월 17일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제1회 동미회전람회(이하 동미전 약칭)를 개최하였다. 제1회 동미전의 중심 역할을 한 김용준은 동미전 개최 직전에 『동아일보』에 「동미전을 개최하면서」라는 글을 발표하여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 옛 미술과 현대 서구예술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우수했던 우리의 미술전통이 전제주의의 제국정치에 의해 쇠미(衰微)해진 당대의 상황을 한탄하며 다시 조선의 예술을 찾자고 선포하였다.
김용준을 중심으로 이러한 야심찬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미회 회우들은 제1회 동미전을 개최하며 참고품으로 조선전통미술 중 고전이라 여긴 김홍도, 정선, 이한철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외에도 동경미술학교 교수들이 찬조한 출품작과 남양(南洋), 인도, 페르시아 등의 골동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제2회 동미전은 홍득순을 중심으로 열리게 되면서 동미전의 취지가 변화되었다. 홍득순은 제1회 동미전에서 표방했던 전통미술의 연구를 원시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의 현실을 정당히 인식하면 거기에서 조선적인 회화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참고품 전시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서구현대미술을 현실도피 경향의 유파로 정의하고 썩은 곳에서 박테리아가 나타나듯이 이들이 현대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며 이러한 이즘을 추구하려는 김용준을 ‘상아탑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려 하는 예술지상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동양주의 토대 속에서 서양의 전위미술과 조선의 전통미술을 연구하여 가장 조선적이고 가장 현대적인 미술을 창출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의 민족성을 드러낼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여 서구 현대미술을 주된 양식으로 차용하고, 선(線)을 강조하거나 빠른 필치를 적용하여 동양적인 맛을 내려고 하였던 동미회의 태도는 동양적 유화, 즉 조선적 유화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