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걸인처럼 떠돌아 다녔다. 그림과 시에 뛰어났던 그는 평양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미술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장리석의 조수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 미술재료를 살 형편이 못되어 궁여지책으로 판화작업을 시작했는데 집안의 마루, 문짝 등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판을 목판으로 사용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평양박물관에 근무하던 오노 타다아키(小野忠明, 1903∼1994)가 최지원의 판화작업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불러 판화도 가르치고, 주호(珠壺)라는 호도 지어주었다. 이때 장리석과 최영림이 최지원을 통해 오노 타다키아라의 집에 드나들며 판화를 배웠다.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최초로 목판화 작품 「걸인과 꽃」을 출품해 입선하였다. 같은 해 강원도의 시멘트공장 서기로 일하면서 몇 차례 선을 보았으나 번번히 퇴짜를 맞자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독주를 단숨에 마시는 바람에 위경련으로 죽었다.
1940년 술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최지원의 재주를 안타까워한 오노 타다아키와 일본에서 돌아온 최영림ㆍ장리석ㆍ황유엽, 그리고 최지원의 동문인 변철환, 당시 평양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박수근을 비롯해 홍건표ㆍ장기표 등이 모여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추모전을 열고,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딴 주호회를 결성했다.
1939년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목판화 「걸인과 꽃」이 입선.
1940년 사후 최지원의 갑작스런 죽음을 추념하여 평양의 미술가들이 주호회를 결성하고 제1회 주호회전을 열었다. 이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매년 전람회를 열어 다섯차례의 주호회전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