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조선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수장가.
생애
3·1운동과 관련해 상해로 건너갔다가 체포당해 복역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1929년 봄, 오세창(吳世昌)의 권유로 광화문에서 조선미술관을 운영하며, 1929년 9월 ‘고금서화전람회(古今書畵展覽會)’, 1930년 ‘제1회 조선고서화진장품전람회(朝鮮古書畵珍藏品展覽會)’, 1940년 ‘십대가산수풍경화전(十大家山水風景畵展)’을 개최하는 등 서화보급에 힘썼으나,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신문, 잡지를 통해 문필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남선전기(南鮮電氣, 지금의 한전) 취제역 이사(현재의 대표이사에 해당)로 취임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활동사항
1929년 불가 생활을 결심한 후 가사(家事)를 정리하러 서울로 올라왔다가 대선배이자 존경하는 오세창(吳世昌)의 권유로 조선미술관을 설립하여 1929년 9월 ‘고금서화전’(1929. 9. 10〜10. 30), 1930년 ‘제1회 조선고서화진장품전’, 1931년 3월 20일 ‘조선명화동경전’, 1932년 10월 1일 ‘제2회 고서화진장품전’을 개최하는 등 10여 년 동안 조선미술관을 경영하면서 서화문화 보급에 힘썼다.
1937년 도산 안창호의 항일 투쟁정신을 따르던 수양동지회의 중심인물로 일제 경찰에 검거당하여 2년 구형을 선고받았다가 상고심 종결 때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수양동지회 사건이 일단락된 직후인 1940년 3월 21일 조선명가서화전, 1940년 5월 28일 조선미술관 창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십대가산수화전(十大家山水風景畵展) 등을 개최하며 조선미술관의 확고한 의지와 민족미술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미술관을 폐관하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1945년 8·15 민족해방을 맞이하여 신문, 잡지에 정치평론, 시국론 등 문필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남선전기(南鮮電氣, 지금의 한전) 취제역 이사로 취임했다. 6·25 전쟁 중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있다가 납북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8)
- 「1930년대 고서화전람회와 경성의 미술 시장-오봉빈의 조선미술관을 중심으로」(권행가, 『한국근현대미술사학 』, 2007)
- 「조선명보전람회와 조선명보전람회도록」(김상엽, 『미술사논단』25, 2007)
- 「한국 화랑의 역사에 관한 연구-1910∼1970년대를 중심으로」(심현정, 경희대학교 석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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