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미술관은 1924년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에서 창립한 미술관이다. 경복궁 안 집경당에서 개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6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후 1940년까지 25년간 20여 차례 조선을 방문해 미술품을 수집했다. 이 기간 수집된 조선 미술품은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의 기반이 되었다. 개관을 위해 야나기와 그의 부인인 음악가 가네코는 강연회와 음악회를 열어 자금을 조달했다. 광복 직후 조선민족미술관의 소장품은 국립민족박물관에 이관되었고, 6·25전쟁 직후 국립중앙박물관 남산 분관에 흡수되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미술품 수집은 1916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후 1940년까지 20여 차례의 조선행까지 25년간 집중된다. 그의 민예론이 형성되는 이 기간 동안에 수집된 조선 미술품은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의 기반이 되었다.
야나기는 첫 조선 여행에서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을 함께 주도해 나갈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를 만났다.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의 저자이기도 한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의 기사로 일하면서 조선의 민예와 도자기 연구에 열의를 가졌던 인물이다.
1920년 말 야나기는 다쿠미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구상하고 다음해인 1921년 1월에 취지문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에 관하여(朝鮮民族美術館の設立に就て」를 잡지 『시라카바〔白樺〕』 12권 1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야나기는 조선의 미술품들이 무익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고 싶다는 바람을 서술하였다. 또한 당시 극한으로 대립되고 있던 조선과 일본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한 방안으로 ‘예술’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미술관 이름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일본인들의 반발을 샀는데, 야나기는 이 글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이 “민족예술(folk art)로서 조선의 풍취가 배어있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고 밝힘으로써 민족이라는 단어가 다분히 민속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용어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조선민족미술관은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안 집경당에서 개관하였는데, 개관식을 위해 야나기와 그의 부인인 음악가 가네코〔兼子〕가 재차 조선을 방문하여 강연회와 음악회를 열어 자금을 조달하였다. 기부한 사람 중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동아일보사의 장덕수,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 등도 있었다.
조선민족미술관의 수장품 수집은 야나기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수집의 방향은 야나기를 중심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이는 1921년 5월 7일부터 11일까지 칸다〔神田〕 류이츠소〔流逸莊〕에서 조선미술관 주최로 개최된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서 잘 드러난다. 이 전람회는 경성에서 개관될 조선민족미술관을 홍보하고 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야나기는 이 전람회의 미술품이 두 세 명이 수집한 200여 점이지만 수집의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전시된 품목은 대부분은 조선시대 백자였고 회화, 자수, 금속공예품, 반닫이 가구가 몇 점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미술품들이 폄하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개최된 이 전시는 야나기의 한국의 미술품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민족미술관의 실질적인 운영은 아사카와 다쿠미가 맡았고 1931년 다쿠미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형인 노리타카〔伯教〕에 의해 운영되었다. 노리타카 역시 개인 소장 공예품 3천 점과 도자기 조각 서른 상자를 한국에 기증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조선민족미술관의 소장품은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가 관장이 된 국립민족박물관에 이관되었고, 이는 다시 6·25전쟁 직후 국립중앙박물관 남산 분관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