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경성박람회는 1907년 경성에서 처음 열린 박람회이다. 한국인들에게 한일 간 산업발달의 우열을 보여줌으로써 통감부 시기에 일제가 한일병합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또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의 양위가 추진되던 시기에 한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박람회장은 본관과 1∼5호관까지 총 6개의 전시관을 두었고, 연예원·식물원·사랑·요리점이 따로 개설되었다. 출품물은 94.3%가 일본인들의 상품으로 채워졌고 관람객의 73%는 한국인들이었다. 이 박람회는 대한제국의 경제에 일본 자본이 들어오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의
1907년 경성에서 처음 열린 박람회.
개설
설립목적
연원 및 변천
박람회 회기는 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였으며, 9월 15일에 개회식을, 11월 1일에 출품자들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을 거행하였다. 입장료는 5원이었으며 1백매 이상은 10%, 5백매 이상은 20%, 1천매 이상은 30%를 할인해 주었다. 관람객 유치를 위해서는 무동들이 무악을 연주하는 홍보행사를 하거나 관람객을 위한 해설요원을 두었고, 연회장을 설치하여 기생들의 연희를 마련하고, 부인들만을 위한 ‘부인데이’를 총 3회 개설하였으며 경품행사도 준비하였다. 총 관람객 208,417명이 입장하였으며, 한국인은 73%에 이르렀다.
박람회장은 본관과 1∼5호관까지 총 6개의 전시관을 두었고, 연예원⋅식물원⋅사랑⋅요리점이 따로 개설되었다. 본관은 원형의 양옥으로 203평 규모였으며 인형과 미술품이 전시되었다. 45평 규모의 1호관에는 농업⋅원예⋅임업⋅수산업⋅광업품이 전시되었고, 120평 규모의 2호관에는 화학제품⋅제조음식품⋅도자기⋅칠보⋅법랑⋅유리⋅종이⋅모피 등이, 역시 120평 규모의 제3호관에는 직물 및 인형이, 84평 규모의 제4호관에는 금속제품⋅장신구⋅문방구 등이 전시되었다. 제5호관에는 회화⋅조각 등 미술공예품과 악기⋅사진⋅인쇄물 등이 전시되었다. 출품물 전체 79,126점 중 한국인 출품은 4,500여 점뿐이었고, 한국 거주 일본인이 22,600여 점, 일본 거주 일본인이 56,500여 점을 출품하여 94.3%가 일본인들의 상품으로 채워졌다. 주로 직물이나 지류, 가내제조품을 출품한 한국 물품과는 달리 공업제품이 출품된 일본제품이 비교되어 한‧ 일간의 산업발달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경성부사(京城府史)』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만세보(萬歲報)』
- 『황성신문(皇城新聞)』
- 「1907년 경성박람회의 개최와 성격」(한규무, 『역사학연구』38, 2010)
- 「한국 박람회의 역사(1907∼1994) - 박람회의 정치성과 식민지성을 중심으로」 (신주백, 『세계박람회와 지역문화』, 심미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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