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를 비롯한 경성 구리개(銅峴)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이 박람회는 한국통감부가 계획하여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가 회장으로, 농상공부 사무관 오가와 쓰루지(小川鶴二)가 사무장을 담당하여 추진하였다. 이 박람회는 대한제국의 경제에 일본 자본이 들어오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무국에서 배포한 설립취지는 “산업의 발달과 무역의 증진을 도모하는 한편 인민으로 하여금 널리 구경하게 하여 지식을 발달케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성의 시민을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한‧ 일간 산업발달의 우열상을 전시함으로써 통감부 시기에 일제가 한‧ 일병합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또한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가 추진되고 의병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한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경성박람회에 앞서서 1906년 5월부산에서 한일상품박람회(韓日商品博覽會)와 1907년 4월인천에서 연선기차박람회(聯線汽車博覽會)가 열렸으며, 경성박람회는 일본이 한국의 경제권에 침투하는 방법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었다. 1907년 5월 주로 일본인 상인들을 비롯한 한‧ 일양국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박람회가 발기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통감부 총무장관이 회장을 맡고 농상공부 사무관이 사무장으로 일을 추진하였으며, 경성 일본이사청 이사관 및 경성민단, 경성상업회의소, 제일은행 한국총지점 간부 등이 참여하였다. 농상공부에서는 전국의 관찰사들에게 훈령을 내려 출품을 독려하였으며, 박람회 관람을 독려하기 위해 철도나 선박을 할인해 주기도 했다.
박람회 회기는 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였으며, 9월 15일에 개회식을, 11월 1일에 출품자들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을 거행하였다. 입장료는 5원이었으며 1백매 이상은 10%, 5백매 이상은 20%, 1천매 이상은 30%를 할인해 주었다. 관람객 유치를 위해서는 무동들이 무악을 연주하는 홍보행사를 하거나 관람객을 위한 해설요원을 두었고, 연회장을 설치하여 기생들의 연희를 마련하고, 부인들만을 위한 ‘부인데이’를 총 3회 개설하였으며 경품행사도 준비하였다. 총 관람객 208,417명이 입장하였으며, 한국인은 73%에 이르렀다.
박람회장은 본관과 1∼5호관까지 총 6개의 전시관을 두었고, 연예원⋅식물원⋅사랑⋅요리점이 따로 개설되었다. 본관은 원형의 양옥으로 203평 규모였으며 인형과 미술품이 전시되었다. 45평 규모의 1호관에는 농업⋅원예⋅임업⋅수산업⋅광업품이 전시되었고, 120평 규모의 2호관에는 화학제품⋅제조음식품⋅도자기⋅칠보⋅법랑⋅유리⋅종이⋅모피 등이, 역시 120평 규모의 제3호관에는 직물 및 인형이, 84평 규모의 제4호관에는 금속제품⋅장신구⋅문방구 등이 전시되었다. 제5호관에는 회화⋅조각 등 미술공예품과 악기⋅사진⋅인쇄물 등이 전시되었다. 출품물 전체 79,126점 중 한국인 출품은 4,500여 점뿐이었고, 한국 거주 일본인이 22,600여 점, 일본 거주 일본인이 56,500여 점을 출품하여 94.3%가 일본인들의 상품으로 채워졌다. 주로 직물이나 지류, 가내제조품을 출품한 한국 물품과는 달리 공업제품이 출품된 일본제품이 비교되어 한‧ 일간의 산업발달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
경성박람회는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리와 유지가 다수 참여하고 정부가 적극 후원하였으며, 문명개화론자들은 그 개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통감부 시기에 고종의 양위와 순종의 즉위라는 정치적인 상황을 경제⋅문화 행사로 무마하고, 행정력을 동원하여 관람객을 유치함으로써 일본 상품의 우월함을 보여준 식민지 박람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