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화단에 등단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 등을 지낸 한국화가이다.
서울출신으로 양정고보(養正高普)와 소화공전(昭和工專) 광산과(鑛山科)를 나왔으며, 청전(靑田)이상범(李象範)의 청전화숙(靑田畵宿)에서 그림을 배웠다.
1935년 서화협회전람회에 「우후(雨後)」를 출품하였고,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만추(晩秋)」로 특선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38년의 「정침(靜寢)」, 1939년의 「침(寢)」, 1940년의 「계간(谿間)」 등의 작품으로 1944년까지 수차례 입선하였다.
1941년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 고희동(高羲東),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등 26명과 함께 ‘재성일류화가신작전(在城一流畵家新作展)’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매일신보사 주최로 조지야(丁字屋) 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세말구제서화즉매회(歲末救濟書畵卽賣會)’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42년 11월에는 조선미술가협회(朝鮮美術家協會)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 정보과와 총력연맹이 후원하여 민중에게 전쟁 시국을 인식시키고 계도한다는 목적에서 개최된 ‘반도총후미술전람회(半島銃後美術展覽會)’에 「흑연선광장(黑鉛選鑛場)」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44년에는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계승한 ‘결전미술전람회’에 「산(山)의 결전장」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 작품을 그린 행적이 있다. 또 남원원수(楠原元壽)로 창씨개명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朝鮮美術建設本部) 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49년 8월 22일부터 일주일간 작품 40여점을 모아 동화백화점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6·25 후에는 광업에 종사하며 화단활동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광산기사로 지질탐사를 하며 찾아다닌 전국의 산을 틈틈이 그림에 옮겼으며, 은퇴 후인 1979년 6월 두 번째 개인전을 신문회관에서 열면서 화필활동을 재개하였다.
한국서화연구회 고문, 범태평양미술서울대전 지도위원, 한국미술대전과 한국문화예술종합대상전의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