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신으로 1938년 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2년 데이코쿠미술대학[帝國美術大學] 유화과를 졸업하였다.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으로 입선하였다. 해방 후 숙명여자중학교, 경기상업학교, 서울경동중학교 등의 미술교사를 지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도쿄의 한국 유학생 출신 미술가들이 모인 재동경미술협회 전람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3년에는 신미술협회에 새로 가담하여 제3회 신미술가협회전에 「소녀상」, 「추과(秋果)」 등을 출품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그 산하의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결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에도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조선조형예술동맹과 조선미술가동맹이 통합하여 조선미술동맹을 출범시키자 서울시지부 집행위원이 되어 ‘이동미술전람회’를 이끌었다.
같은 해 독립미술협회에서 첫 발표전을 동화백화점에서 가질 때 이쾌대, 손응성, 이중섭 등과 함께 출품하였고, 1947년 조선미술동맹의 춘계정기전, 1949년 서울 대원화랑의 유화신작전에 참여하였다. 1950년 1월 결성된 50년미술협회에 가담하였지만 6·25전쟁이 발발하여 곧 해산되었다. 9·28 서울 수복 후 월북하여 평양건설건재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1940), 「추과(秋果)」(1943), 「모란꽃」(195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