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축회는 1922년 4월 30일에 한반도 내 일본인 건축인들에 의해 결성된 건축단체이다. 발기 당시 회원들 대부분은 총독부의 관리·건축가·시공자 등 건축 관계자들이었다. 한인으로는 김응순이 유일했다. 9명의 이사가 있었으며 회장은 모두 총독부 건축 관료들이었다. 『조선과 건축』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조선건축회 활동은 1929년까지 경성의 도시문제와 주택문제에 집중되었다. 이 단체는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존재했다. 이들의 기관지는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일인들의 건축 활동을 연구하는 자료로 이용된다.
조선건축회는 조선총독부의 건축인을 중심으로 1922년 3월 8일 경성공회당에서 발기총회를 갖고 4월 30일에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3일에 사단법인 체제로 변경되었다. 조선총독부 건축관리와 건축가, 그리고 시공자 등 건축 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존재하였다.
조선건축회는 9명의 이사와 2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과 일본에서도 명예회원이 위촉되었다. 초대 회장을 비롯하여 조선건축회의 회장은 모두 조선총독부 건축 관료들이었고, 조선에서 위촉된 명예회원에는 박영효, 송병준, 이완용 등 3인의 친일파 한인이 포함되어 있다. 발기 당시 122명의 회원은 대부분 조선총독부 관리를 비롯하여 설계와 시공 그리고 건축자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한인으로는 김응순이 유일하였다.
회원 규모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1937년에 일본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된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1939년에 1,054명, 1943년에는 1,914명으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는 전쟁기에 조선의 병참기지화로 인해 공장과 주택 수요가 급증하면서 건축과 토목 수요가 늘어난 것 때문이다. 발기회에서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는 “건축이 사회발전과 복리증진 그리고 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에서 건축사업의 면목을 일신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조선건축회의 역할이 필요함”을 밝힌 바 있고, 이완용은 조선건축회가 “조선문화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조선가옥의 개선에 시급하고 이에 대한 노력을 기대한다.”라고 언급하였으며, 회칙 제1조에서도 “조선 건축계의 견실한 발전을 기한다.”고 밝혔지만, 조선건축회의 구성원과 성장과정 그리고 전시체제하에서 보여준 활동은 조선건축회가 식민지정책에 충실하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건축회의 활동은 1929년까지는 도시문제와 주택문제에 집중되었다. 특히 과밀화되는 경성의 시역 확장과 시가지 건축관리를 위한 법 제정과 주택개선을 위한 현상설계모집, 박람회를 통한 문화주택의 보급에도 참여하여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의 현안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조선박람회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는 경제 불황으로 주목할 만한 활동은 없지만 상가와 복합건축에 대한 현상모집 등의 활동이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소주택도안현상모집’과 ‘조선의 중류주택조사’, 그리고 ‘조선주택개량시안’ 등 주택조사와 온돌개량에 관한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일반 서민의 주거문제 해결보다 한반도에서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함흥 · 청진 지역 등의 공업도시에 위치한 군수산업체 노동자의 주거개량을 위한 사업의 성격이 강했다. 이밖에 새로운 건축술인 철근콘크리트 구법에 관한 강습과 주택현상공모 등 신기술과 건축행사와 관련한 각종 사업도 조선건축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은 1922년 6월에 창간호가 발행되어 1945년 7월과 8월 합병호인 24집 4호가 발행되었는데, 한반도 내 정보교환은 물론 일본과 타 식민지와의 건축정보를 교환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식민지정책에 따른 주요 건축 활동과 민간의 건축 활동이 기록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도시와 건축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과 건축』은 현상공모를 통해 표지를 공모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도 『조선과 건축』 표지는 한인건축가로 문학계에 걸출한 족적을 남긴 이상(본명 김해경)의 디자인이 당선되어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과 건축』에는 이상의 초기 작품인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오감도」, 「삼차각설계도」 등이 다수 게재되어 있어 건축은 물론 문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건축회는 일제강점하 한반도 내 건축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유일한 건축단체로 조선총독부의 식민지정책하에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에는 그들의 활동상과 식민지 조선 내의 건축 활동이 충실하게 게재되어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일본인들의 건축 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건축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건축회가 조선총독부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고,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은 일본인들의 건축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있어, 조선건축회와 『조선과 건축』은 일제강점하의 한인들의 건축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