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주택 ()

문화주택 1
문화주택 1
건축
개념
일제강점기에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
내용 요약

문화주택은 일제강점기에 서양 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서 지은 주택이다. 개항 이후 전통주택의 비기능성·비경제성·비위생성 개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양식 주택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서양식 주택, 일명 문화주택을 지었는데 문화주택의 중요한 기준은 위생이었다.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로 서구식 문화주택에 대한 선호는 새마을운동 시기까지 이어졌다. 전후 복구사업 중 공급된 공공주택은 서구식 거실 중심의 문화주택으로 지어졌다. 문화주택은 일제강점기에 위생을 매개로 새로운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에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
내용

문화주택은 서양식 생활양식과 주택형식이 전통 주택건축의 비기능성, 비경제성, 비위생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이다.

개항 이후 전통주택의 개선 필요성이 많은 지식인을 통해 제기되었다. 문명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생적인 주거공간과 도시공간의 실천이 절대적이며, 위생에 대한 관념은 ‘비위생=미개, 위생=문명’이라는 주거의식이 지식인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계몽담론 차원에서 논의되었을 뿐 주택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위생 관념이 주택에 명시적으로 반영된 것은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1922년 동경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출품되었던 서구식 외관과 공간구조를 갖춘 가족본위의 서양식 생활양식이 가능한 14개동 주택이 조선에도 소개되었으며, 이후 서울에서도 「문화주택도안전람회(文化住宅圖案展覽會)」와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1929년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대박람회에서는 가족 중심의 공간구성, 부엌과 화장실이 개량된 3동의 주택이 출품되기도 하였다.

전통주택건축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최초의 한인건축가인 박길룡, 김윤기, 박동진에 의해서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생적인 주택지와 부엌과 화장실의 개선을 중심으로 한 기능성의 확보와 위생적이고, 경제적인 주택을 우리주택의 나아갈 방향으로 인식했으며, 주택개량의 근간은 서양주택이었다. 한편, 개량한옥을 공급하는 건설청부업을 운영했던 건양사의 정세권은 ‘정원이 있고,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면 문화주택‘이라며 자신이 공급하는 한옥은 이러한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문화주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축가와 건설업자 사이에 주택형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문화주택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위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는 한인 지식인과 일본인주거지를 통해 간헐적으로 문화주택이 공급되었다면, 30년대에는 서울의 인구 급증에 따른 주택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하고,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주거지가 대대적으로 개발되면서,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문화주택이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건축된 서대문밖 홍난파 주택과 후암동의 조선은행 사택 그리고 장충동과 신당동의 무학(舞鶴)주택지와 서대문밖 충정로에 위치한 금화장 문화주택지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건축된 문화주택의 경우 건축양식은 서구식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일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탓에 문화주택보다는 일식주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27년 12월 8일 조선을 방문했던 이토 추타(伊東忠太)는 “문화주택은 그 나라와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은 것이므로 일정한 전형이 있을 리가 없다”고 하며, 일본에 만연해 있는 구미 각국의 양식을 모방하는 세태를 지각없는 짓이며 우스운 노릇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문화주택에 대한 선풍적인 인기는 1930년 조선일보에 실렸던 만평에서도 잘 나타난다. 결혼적령기의 여성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만평과 은행으로부터 무리하게 빚을 얻어 지은 ‘文化住宅’을 여름철 모기로 인한 화근에 비유한 '蚊禍住宅'이라 부른 것은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문화주택 관련 세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서구식 문화주택에 대한 높은 사회적 선호도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전후 복구사업 중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되었던 공공주택은 서구식 거실중심의 주택으로 지어졌고, 이들 주택은 예외 없이 문화주택이라 불렸다. 문화주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새마을운동 시기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지방의 낙후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에는 “우람한 철대문에 초인종이 달렸고 상수도가 부엌까지 들어오는... 알루미늄샤시로 창문을 달았고, 고급 미장합판으로 마루와 천장”을 만든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지칭하며 이러한 모습은 모두 대도시 문화주택 못지않게 번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지난 세기 우리 사회에서 문화주택의 ‘문화’에는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향해야할 모범답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에 건강한 삶에 대한 사회적 욕구 해결을 위해 등장한 ‘위생’을 매개로한 서구식 문화주택이 소수의 한인 지식인과 일인 중심으로 보급된 반면, 건강하고 편리한 삶은 전통주택의 개량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인식한 한인 건설업자에 의해 개량한옥이 대량으로 공급되면서, 도시한옥이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유형의 문화주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주택’을 통해 본 한국주거근대화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연구」(김용범,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일제강점기 문화주택 개념의 수용과 전개」(이경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한말 근대적 주거의식의 형성」(김명선,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농촌새풍속도(155)」 (『경향신문』, 1978.6.5)
「1일1화(8) 문화주택? 문화주택?」 (『조선일보』, 1930.4.14)
「여성선전시대가 오면」(『조선일보』, 19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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