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은행원 생활을 하며 서양악기와 작곡을 개인 교습을 받거나 독학하여 음악의 기초를 다졌다. 전문음악인으로 전향한 후 실내악단과 교향악단의 연주자로 활약하며 현장감을 익혔다. 서울 시립 교향악단 부지휘자, 육군본부 군악대장, KBS 스몰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국립가무단 단장, 경희대학교 음악과 교수, 서울국악예고 서양음악 담당 강사, 서울예술대학 국악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작곡가, 지휘가로 한국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20년 11월 21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19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한성은행(조흥은행으로 변경)에 들어가 은행원 일과 음악 공부를 병행하였다. 즉 김흥조에게 피아노를, 안병소에게 바이올린을, 안성교에게 비올라를, 김순남에게 작곡을 배우고 화성학과 대위법은 독학하였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10년간 군악대장을 맡으며 육군 군악대를 이끌었다. 1957년 10월부터 신흥대학교(현재 경희대학교) 작곡과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아 후학을 지도하였고, 1958년부터 KBS스몰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겸하였다. 1962년에 신흥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예그린 악단에 편곡자로 입단하였다. 1963년 서울 국악예고 강사로 재직할 때 민속음악의 명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갖게 되었으며,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서 작곡과 편곡을 담당하였다. 1968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974년까지 7년간 활동하였다가 1974년 국립가무단(예그린 악단의 개칭)의 초대 단장을 역임하였다. 1982년부터는 서울예술전문대학 국악과 교수를 맡으며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한편 86아시안 게임의 음악 총 감독직을 수행하고, 88서울올림픽의 개ㆍ폐회식 마스게임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1988년에 서울예술전문대학을 사임한 후, 작품 창작에 매진하였고, 객원 지휘 맡기도 하였다. 2001년 9월 4일 별세하였다.
작곡가, 편곡자, 지휘자로 활동하였는데 국악을 소재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창작했던 작곡가라는 점이 주목된다. 국악관현악곡, 합창곡, 무용음악, 뮤지컬,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작품 속에 국악을 풀어냈던 것이다. 즉 군가 및 군악대 행진곡을 한국화하고, 서양악기와 국악기를 함께 편성한 작품을 써서 양악기과 국악기의 합주를 정착시켰으며, 창과 국악관현악의 접목을 계발하였고, 짜임새 있는 합주곡 형식을 완성하였으며, 민요를 편곡하고, 민속음악을 합창곡화 하는 등 선구적인 역할을 해냈다.
대표 작품으로는 「단소와 관현악을 위한 수상곡」, 「창과 관현악 범피중류」, 뮤지컬 「대춘향전」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혼성 한국민요합창곡집』(세광음악출판사, 1981), 『김희조 고희 기념 작ㆍ편곡집』(수서원, 1989), 『합주곡 전집』(한국창작음악연구회, 1999)이 있다.
제4회 방송문화상 음악상, 제1회 청룡영화상 음악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옥관문화훈장, 뮤지컬의 날 공로상, MBC 가곡 공로상, 어린이문화예술원 주최 반달동요대상을 수상하였다.
추모 행사로는 제1주기 추모공연이 이행된 바 있다. 2002년 11월 2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제258회 정기연주회로 마련된 것이다. 이 때 국악관현악단 단장 겸 지휘자인 김성진 외에 김희조의 차남인 김덕기 서울대 교수가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기도 하여 추모음악회의 의미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