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인사회의 문예지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 잡지이다. 1960년대 말 브라질 한인사회는 소위 “구파와 신파” 두 그룹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브라질 정부의 한국인들의 집단영농이민 금지이다.
한국에서 브라질 이민을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브라질 이민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그들은 우선 파라과이나 볼리비아 등의 브라질 이웃국가로 이주했다. 그리고 불법으로 브라질 국경을 넘어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 당시 브라질에 거주하던 한인 수는 약 1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 50%가 불법이민자들이었다. 따라서 불법이민자들은 자신의 법적지위를 해결하기 위해, 즉 영주권 취득을 위해서 김홍기(볼리비아 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신파” 그룹인데, 이들은 군 출신의 한국대사는 물론 정식으로 집단영농이민 비자를 받아 브라질에 입국한 “구파” 그룹과 심하게 반목했다.
그런데 한인들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 상파울루에서 신파를 이끌고 있던 김홍기가 「교민회」회장으로 뽑히게 되면서 그 갈등은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우선 리우데자네이루 소재 한국대사관이 그를 교민회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몇몇의 군 출신이의 구파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도록 했다.
이때 생겨난 단체가 「교민회관건립기성회」였다. 하지만 이 단체는 곧바로 「문화회관건립기성회」로 개칭되었다. 그것은 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받은 한국정부의 보조금으로 건물 한 채를 구입했다. 구파는 교민회관 대신 문화회관을 세우기 위해 1969년 또 다시 단체의 명칭을 「(한국)문화협회」로 바꾸었다 (이 때 이 건물내 에 한국대사관의 「상파울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69년 결성된 「(한국)문화협회」의 회원 대부분은 한국의 중상류층 출신으로 지적인 욕구가 상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문화회관에 모여 브라질 역사, 사회, 문학 그리고 음악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그것의 결과물이 1970년 8월에 발간한 잡지 『백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재이주하거나 혹은 작고하여, 오늘날 브라질에는 주성근만이 산 증인으로 남아있다.
「(한국)문화협회」가 발간한 『백조』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그것의 성격은 머리말에서 언급한 것 처럼 문예지이다. 이 협회는 총 65 페이지로 된 두께가 엷은 창간호를 발간한 이후 또 다시 또 다른 한 권을 발간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총 2권이 발간되었다.
『백조』의 편집인은 주성근과 목진태(음악가)이다. 하지만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잡지에 글을 실은 저자들은 익명으로 자신의 시와 수필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한국과 브라질의 무역상황 그리고 브라질 역사와 음악에 대한 글도 포함하고 있다.
브라질 한인사회가 가장 분열되어 있었을 때, 구파가 중심이 된 「(한국)문화협회」가 발간한 잡지로서 향후 브라질 한인사회에서 나올 문예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