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산

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브라질에서 한인교포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만든 교민. 의류제조업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1년 5월 5일
사망 연도
2009년경
출생지
만주 안동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브라질에서 한인교포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만든 교민. 의류제조업자.
개설

만주에서 태어났다. 1964년 12월 30일 ‘까우사 이민(CAUSA)’으로 브라질에 도착하였으며, 1966년 영주권을 획득하였다. 까우사 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브라질에서 영주권을 획득할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경비를 투자했는데, 그러한 과정 자체가 모두 브라질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였기 때문에 그만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질에 도착한지 3개월 만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여러 종류의 옷 견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시장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러한 자신있는 행보를 보인 것은 부산국제시장에서 넥타이를 만들어 판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일본인 촌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 상업지역인 꼰지 데 사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거리에 마련한 자신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의 활발하고도 화려한 활동기간은 약 5년(1969-1974)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그의 큰딸과 부인이 뜻하지 않게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애지중지해서 키운 큰딸이 결혼 직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1968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부인 김경자(Margarida)도 1973년 패션쇼 참가 직후 과로로 사망했다. 이후 그는 일본계 젊은 여성과 재혼하고 거주지를 산토스(Santos)로 옮겼다. 그러나 그녀와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삶은 자연스럽게 한인사회로부터 멀어졌다. 하지만 사망 직전까지 새로운 사업에 대한 꿈과 열정을 피력하곤 하였다.

생애

김수산의 선조들은 1860년대에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만주의 안동시에서 1921년 5월 5일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일본인 목재회사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중매로 신의주 출신의 여성 김경자와 결혼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그동안 그가 모시고 있던 일본인 사장은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 이 일본인 사장은 그를 일본으로 함께 데려가고자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만주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그는 일본인 사장의 양자가 되려고 서류 구비에 동분서주하였지만, 관계 서류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가족(아내와 4살 난 큰딸)을 데리고 우선 처갓집이 있는 신의주로 이주했다.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1·4후퇴 때 신의주에서 부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넥타이를 제조하면서 부산 국제시장의 조합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는 부산에서 가장 부촌인 보수동에 저택 한 채를 구입했다. 그곳은 전직 한국은행 총재가 살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가족 - 부인과 여섯 명의 딸들(큰딸은 만주 태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얻은 막내아들 - 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 배경은 정치권으로부터 정당에 가입하라는 강력한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때 정당의 관련자들은 그를 정당에 가입시키려고 밤낮으로 찾아가 귀찮게 했다. 이때 그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지 않고 조용하게 살기 위해서는 정치판에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상기했다. 그리고 그는 “국가란 ‘큰아버지’와 같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좁은 한반도에 있지 말고, 멀리 다른 큰 나라에 가서 살 거라” 라는 아버지의 또 다른 당부의 말씀을 되새기며 브라질행을 감행했다.

활동사항

김수산은 이철희가 추진했던 브라질 경유 볼리비아 이민, 즉 까우사(CAUSA) 이민으로 브라질에 도착했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농촌에 정착하지 않고, 브라질 최대 상공업의 도시인 상파울루 시내에 정착하며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당시 그와 함께 브라질에 도착한 사람들은 주로 철물점, 주차장, 동양식품점, 양계장, 훼이라(feira)라고 불리는 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했다. 그는 시내 중심가에 담배 가게를 먼저 차렸지만, 곧이어 의류제조업으로 전환했다.

그가 도시 상파울로에서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곳은 지금의 연합교회가 있는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의 토마스 지 리마(Tomas de Lima)거리, 두 번째 마련한 집은 주엉 데 까르발류(João de Carvalho) 거리였다. 그리고 ‘제품’을 시작한 지 약 2년 만에 마련한 세 번째 집은 깜부치(Cambuci) 구(區)의 콘셀례이루 프르따두(Conselheiro Furtado) 거리에 있었다. 이 집은 상당히 커서 주말이면 늘 한인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 마가리따(Margarita)는 아버지 김수산이 특별히 30명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탁을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이 KBS의 1969년 혹은 1970년도 영상자료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 집은 일본인 촌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 상업지역인 꼰지 데 사르제다스(Conde de Sarzedas)거리의 상가를 겸한 건물이었는데,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의류를 생산했다.

그러나 이 분야의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5년 남짓밖에 활동하지 못했다. 그것은 불행한 가족사 - 1968년 교통사고로 인한 큰딸의 사망과 1973년 패션쇼 참가 이후 과로로 인한 부인 김경자의 사망 - 와 관련이 있다. 이후 일본계 젊은 여성과 재혼한 그는 한인사회로부터 조금 떨어진 도시 산토스(Santos)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브라질 한인사회에서 처음으로 옷을 만들어 낸 배경은 그가 어느 정도의 자본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재료들과 기계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서 이미 넥타이 및 속옷 등을 제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사용하고 남은 메리야스 종류의 천들, 다양한 레이스 등의 부속품들, 그리고 기계들을 모두 브라질로 가지고 갔다.

브라질에서는 집에서 가족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가내공업 형태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은 겨울잠바였다. 그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질 건물에는 난방시설이 전혀 구비되지 않아 겨울에는 두껍고 따뜻한 옷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가 이루어 낸 성공은 그의 밑에서 바느질을 하며 일을 돕던 한인들이 따로 독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여러 한인 제품업자들이 생산해 낸 의류들은 소매상과의 중간역할을 하는 판매원이란 뜻의 “벤데돌(vendedor)”이 맡아했다. 따라서 브라질에 새로이 도착하는 한인들은 “제품”의 매커니즘을 익히기 위해 가장 먼저 이 “벤데돌” 일을 시작했다. 김수산의 공로가 인정되어 상파울루 시정부와 의류협회는 그에게 작위(Comendador)를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아마존의 꿈』(오응서, 남미동아일보 : 상파울루, 2004)
『송암 문학전집』(이인길, 브라질한국일보 : 상파울루, 1983)
집필자
최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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