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말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로 일년이 편안하고 농사가 잘 되도록 기원하는 도당굿이다. 마을이 개발이 되고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풍농보다는 대동의 발전을 기원하는 굿으로 바뀌었다.
제차나 굿 내용 면에서 다른 지역의 도당굿 제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연행할 수 있는 사람과 비용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시루말, 장문잡기, 손굿 등이 사라진 점이 현재의 벌말도당굿의 변질된 모습이다. 그리고 돌돌이가 형식상으로만 간단하게 행해지고, 조상굿도 이름만 지어 간단하게 연행하고, 나머지 거리들도 제대로 연행되지 않아서 축소되고 있다. 또한 경기도도당굿 예능보유자였던 오수복에 의하면, “벌말은 몇 년에 한 번씩만 큰굿을 하고, 평년에는 여자들끼리 모여서 동탱이(퉁탱이굿)로 굿을 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형식을 갖춘 화랭이굿은 몇 년에 한 번씩만 행하고, 평년에는 부녀자들과 주무만이 모여 간단하게 굿을 한 것으로 보인다.
벌말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여자들이 굿 준비에 더 적극적이었는데, 남자들이 굿에 참석했을 때에도 비용 추렴은 여자들의 몫이었다고 하며, 남자들로 이루어진 두레패가 사라지자 여성들이 풍물을 배워서 돌돌이를 돌았다고 한다. 이는 여자들이 매년 당굿에 참여하면서 저간 사정을 남자들보다 훨씬 잘 알게 되어 역할 비중이 커진 듯하다.
또 다른 이유는 인근에 공장이 생기면서 남자들이 직장 생활을 하게 되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성들이 굿 준비를 맡게 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당주무가 인근 세류동에 사는 여성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류동과 평동은 거리상으로도 가까웠고, 당주무인 버드내 마나님은 평동과 고색동에 많은 단골을 거느리고 있던 큰무당이었다고 한다. 무당집으로 무꾸리(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점을 치는 일)나 치성을 다니는 것은 부녀자들의 몫이므로 이 과정에서 같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당굿에 관한 논의를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벌말도당굿을 지켜온 사람들은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굿 비용을 마을에서 준비하지 못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도당굿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줄어들어 주민들이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반면, 굿 연구자나 보존회 회원들이 굿판을 유지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