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의 종가 사당에 봉안되어 있는「이산해 초상」은 비단 바탕에 수묵채색으로 그렸고, 크기는 세로 177.0㎝, 가로 106.0㎝이다. 원래 족자였으나 유리를 낀 액자로 개장된 상태이며, 2009년 1월 20일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산해 초상」은 바닥에 화려한 채전이 깔려 있고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의 관복(官服)을 갖춰 입은 주인공이 교의(交椅)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全身像)이다. 사모의 형태와 높이를 비롯해 단령 왼쪽 트임 사이에 일직선으로 표현된 치맛자락, 등받이로 연결된 교의의 왼쪽 손잡이, 선묘 위주의 표현 등 17세기 초 광해군대 공신 화상(功臣畵像)의 도상을 보여준다.
아계(鵝溪) 이산해(1539∼1609)는 선조와 광해군대에 걸쳐 모두 네 차례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우선 1590년(선조 23)에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에 포함되었다. 사후(死後)에도 1612년(광해군 4)에 정운공신(定運功臣)으로, 1613년(광해군 5)에 익사공신(翊社功臣)으로 책록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삭훈되었다. 그리고 설사(雪蓑)남이공(南以恭, 1565∼1640)의 「아계선생화상찬(鵝溪先生畵像贊)」이 전하고 있어 늦어도 1640년(인조 18) 이전에 제작된 이산해의 초상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공신 책록을 계기로 제작된 작품과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초상화의 세부 표현, 특히 어두운 안색을 비롯해 미간과 눈자위, 콧망울과 법령(法領)에 가해진 음영 표현으로 인해 공신 책록 당시의 원본으로 보기는 어렵다. 진한 갈색을 덧칠한 음영 표현이 어색하고 여러 겹의 쌍꺼풀과 주름살, 필선을 반복해서 묘사한 수염이나 흉배의 공작 문양 등이 엉성한 편이다. 한편 1894년(고종 31)이산해의 후손 수당(修堂)이남규(李南珪)가 이 작품을 모본으로 삼아 2점의 「이산해 초상」를 더 제작했는데, 각각 국립중앙박물관과 수당고택에 소장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알려진 3점의 「이산해 초상」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례이고, 종가 사당에 봉안되어 전해온 만큼 유전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다만 1980년대 족자를 액자로 개장함으로써 원래의 형식이 보존되지 못한 상태이고 화풍상의 특징으로 미루어 후대의 이모본(移摹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신 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이산해의 초상화이고, 17세기 공신 초상화의 전형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