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미대사 공한 ( 에 따른 )

외교
사건
일명 브라운 각서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및 경제원조를 공한(Memorandum) 형식으로 약속한 문서.
이칭
이칭
브라운 각서, Brown Memorand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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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미대사 공한은 일명 브라운 각서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및 경제원조를 공한(Memorandum) 형식으로 약속한 문서이다. 박정희는 군사 원조 및 전쟁 특수를 통한 경제개발을 위해 베트남 파병에 적극적이었다. 1965년 베트남에서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미국은 추가병력을 검토하였고, 이에 한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위해 1966년 브라운 각서를 체결하였다. 베트남파병에 따른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훨씬 초과한 연평균 12%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정의
일명 브라운 각서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및 경제원조를 공한(Memorandum) 형식으로 약속한 문서.
개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까지 4만 7,872명이 베트남전쟁에 참가했으며,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 회의 군사활동을 수행하여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국은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군을 현대화하고 일부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며, 한국기업의 베트남진출과 한국상품의 수출을 지원했다.

역사적 배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이후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와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는 등 베트남전 참가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주한미군이 베트남으로 파견되는 것을 차단하고, 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1964년 5월 대한민국 언론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베트남을 원조하자는 자유진영에 대한 미국의 호소에 즉각적이고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고, 대한민국 정부도 한국 군대를 파병하는 데 우호적이었다.

한국이 가진 동기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방어해준 미국과 자유진영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로 여겨 파병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보다 이해타산적인 수준에서 한국인들을 재정 및 군사원조 그리고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 관여의 관점에서 미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1964년 11월 3일 합동참모부 의장( 김종오)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제안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직후 박정희는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브라운(Winthrop G. Brown)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필요하다면 2개 전투사단을 보낼 의사가 있다는 점을 다시 전달했다. 박정희는 한국에는 퇴역군인이 많기 때문에 퇴역군인들을 2개 정도의 전투사단으로 만들어 보내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파병을 통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할 경우 미국은 한국군을 감축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파병부대를 퇴역군인들로 새로 구성할 경우 자동적으로 한국군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미국이 새로운 부대에 재정 지원을 한다면, 그것은 한국정부에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1965년 베트남에 대한 직접 개입을 선언한 이후 베트남에서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미국은 추가병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1965년 3월 북폭 개시 이래 전쟁은 계속해서 미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지만, 미국은 좀 더 많은 물량을 투입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1965년 12월 30일 존슨(Lyndon B. Johnson) 미 대통령은 한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1966년에 들어서는 한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더라도 한국의 전투부대 파병이 더 늘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1966년 브라운 각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내용

베트남전의 파병을 앞두고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의 고려를 위해 제안된 경제 · 재정적 지원(Economic and Financial Supports Suggested for Review by USG)’이라는 제목의, 미국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사항들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① 파병을 위한 추가 재정부담. 여기에는 사상자에 대한 보상, 이미 베트남에 있는 맹호부대를 대체할 새로운 사단 창설을 위한 비용을 포함한다. ② (다음 5개년계획이 끝나는) 1971년까지 군사예산의 75%를 미국이 지원한다. ③ (1963년까지 46억원으로 추정되는) 유엔군이 징발한 땅과 건물에 대해 보상한다. ④ 문화 · 교육 · 사회복지 계획을 위하여 ‘미국 대통령 긴급자금’에서 1천만 달러를 특별 원조한다. ⑤ 군사원조계획과 AID로 다양한 해외조달 제안.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한국에 우선권을 준다. 군 보급과 수리에서 한국 시설의 이용을 확대하고, 베트남에 대한 해외조달 (예컨대 철과 강철)에서 물품을 취사선택하는 미국의 정책을 폐지한다. ⑥ 1억 5천만 달러의 공약 아래 계획의 승인을 촉진하고 1966년 말 이전에 인천 · 여수 · 포항 · 마산 · 부산 항구의 확장 지원 등 다양한 개발차관을 제공한다. ⑦ 한국의 대미 수출 촉진. 한국의 면제품에 대한 미국의 쿼터 시스템 철폐한다. 등 총 10개항으로 미국의 지원분야를 열거하여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체는 아니지만, 한국정부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한미대사의 브라운 각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4일자로 당시 주한 미 대사인 브라운이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이다. 이 각서는 크게 2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군사협조와 경제지원으로 각각 세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에서 미국은 한국방위의 안전이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규정했다.

첫째 군사부분에서의 미국의 원조이다. ① 대한민국 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위해 수년 동안에 상당량의 장비를 제공한다. ② 추가병력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하며, 파월 추가병력에 따르는 일제의 경비를 부담한다. ③ 파병병력을 대치하는 보충 병력을 장비하고, 이에 따른 비용을 부담한다. ④ 한국의 대간첩 활동 능력을 개선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요구를 충족하는데 기여한다. ⑤ 대한민국의 탄약생산을 위해 병기창 확장용 시설을 제공한다. ⑥ 대한민국 측 전용 통신시설을 제공한다. ⑦ 대한민국 공군에 C-54기 4대를 제공한다. ⑧ 막사, 숙소 및 오락 시설 등 부대 복지를 위해 필요한 재원을 군사원조계획 잉여물자의 매각대금에서 제공한다. ⑨ 주월한국군 전원에 대하여 해외 근무수당을 부담한다. ⑩ 월남에서 발생하는 전사상자에 대하여 한미합동군사위원회에서 합의된 액수의 2배 비율로 보상금을 지불한다.

둘째는 경제 원조를 구체화하였다. ① 추가병력의 파월과 한국내에서 1개 예비사단, 1개 예비여단 및 지원부대를 동원, 유지함에 소요되는 순 추가비용의 전액과 동액의 추가 원화를 한국 예산을 위해 지출한다. ② 한국군 2개 사단 병력이 월남공화국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는 군원이관을 중지하며 해당 품목을 한국에서 역외 조달한다. ③ 대한민국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물자 용역 및 장비를 실행할 수 있는 한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구매하며, 주월미군과 월남군을 위한 물자 중 결정된 구매품목을 한국에 발주한다. ④ 수출진흥의 전반부문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대한 기술원조를 강화한다. ⑤ 대한민국에 대하여 이미 약속한 바 있는 1억 5천만 불 AID차관에 추가하여 미국은 적절한 사업이 개발됨에 따라 추가 AID차관을 제공한다.

이상과 같이 브라운 각서는 베트남에 파병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군사지원과 경제지원을 명문화한 문서로서 미국의 지원을 강화하였다.

결과

미국은 한국군 파병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군을 현대화하고 일부 군수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며, 한국기업의 베트남진출과 한국 상품의 수출을 지원하였다. 미국에서 받은 자금과 대 베트남 수출증가는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미국이 대한원조를 줄여나가는 시점에서 이러한 과정들이 진행됐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가장 큰 지지기반인 군대의 증강도 이루어졌다. 전투경험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예비사단이 전투사단화되었고, 1개의 준(準)전투사단이 새로 창설되었다.

의의와 평가

베트남파병에 따른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훨씬 초과한 연평균 12%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미국에 심각하게 예속된 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을 뿐 아니라 베트남 파병은 최근의 고엽제 피해자 문제나 베트남의 한국인 2세 문제 등에서 나타난 듯 한국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참고문헌

『우방과 제국』(박태균, 창비, 2006)
『국방조약집』제1집(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1)
집필자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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