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석불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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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1952년 6월 정부가 중석불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 기업체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
이칭
이칭
중석불불하사건, 중석불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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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2년 6월 정부가 중석불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 기업체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
내용

1차 중석불 사건은 대한중석에서 생산되는 중석을 수출하여 얻어지는 달러가 특정 무역업자에게 흘러간 사실이 밝혀져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정부와 야당 간에 정치적 쟁점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중석달러는 당시 수출의 주종품이었던 중석을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이 돈은 대한 중석의 외화처분 요강에 의거해 선박, 광산용 자재 및 전기자재, 기계류 등의 수입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기업인들은 재무부 및 농림부 고위관리들에게 접근, 긴급을 요한다는 명목아래 중석달러를 비료 및 양곡 수입용으로 전용하여 배정받기 위한 로비를 펼쳤다. 정치권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시키려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어서 이를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당시 국회 특별조사위원회의 1차 보고서에는 “대한중석의 노무자용 백미수입을 위한 중석불 20만 달러의 불하를 계기로 미진상사에 15만 1천 달러를 비롯, 모두 14개 무역업자에게 비료수입용으로 91만 9천 5백 달러, 양곡수입용으로 3백만 5천 4백 80달러 등 모두 3백 95만 6천 4백 30달러가 불하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업자들은 이를 가지고 5배의 장사를 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국회는 뒤늦게 중석달러 배정의 흑막을 알아채고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내막을 파헤치겠다고 나섰고 야당은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폈으나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무역업자들이 5백억 원의 부당폭리를 취했다는 사실만 겨우 공표하는데 그쳤다.

검찰의 수사 착수는 8월 27일에야 마지 못해 시작됬는데 미진상사 이연재와 남선 무역 김원규, 영동기업 최정석, 신한기업 강한욱 등과 해당 기업의 임원 몇 명을 기소했으나 공판정에 담당검사가 입회조차 하지 않아 공판이 연기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재판부는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 피고인들에게 영장을 발부했으나 영장이 집행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부산지검 검사장은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주모자를 체포하도록 경남도 수사과에 엄중 지시했다고 발표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도 휴전과 함께 흐지부지되어 관련 무역업체는 사건 발생 5년 뒤인 1957년 4월 대구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이라는 싱거운 판결로 중석불 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중석불 사건으로 백두진 재무장관, 박희현 차관, 최도용 이재국장, 황호영 이재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승진,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더욱 짙게 하였다.

참고문헌

「1950년대 외환제도와 환율정책에 관한 연구」(최상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매일경제』(199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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