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의 한인사회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은 미주한인사회운동의 중요한 한 갈래이다. 즉 미주사회운동은 크게 세 갈래의 움직임이 있었다. 첫째는 남한의 민주화를 목표로 활동한 ‘한민통’, ‘국민연합’, ‘민통연합’계열이 주도한 민주화운동, 둘째는 조국통일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교류 및 연대를 중시한 ‘미주민련’과 ‘통협’계열의 통일운동, 그리고 앞의 두 계열과는 달리 미주 사회운동의 독자적 역할을 모색하여 남한과 북한 어느 쪽에도 종속되지 않고 남북 및 해외의 국제적 연대까지 추진한 ‘한청련’, ‘한겨레’계열의 민족운동이 그것이다.
미주한인사회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 사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즉 미주한인사회가 빠르게 성장한 시기는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 된 이후였기 때문에 1970-1980년대까지 재미한인의 대다수는 이민1세로서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하고 일체감을 갖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미주한인들은 여전히 한국의 국내문제에 민감한 반응과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미주한인사회의 사회운동은 한국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같이 움직였고, 광주사태, 6.15선언 등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그에 반응하여 활발한 움직임이 있어왔다.
미주의 한국민주화운동은, 한국에서 갓 이민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1970년대에 한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김대중 전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정치적 사건이 촉발제가 되어 일어났다.
1970년 이전 미국에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거나 한국을 떠나온 관료와 정치인이 소수 남아있었고, 그들은 일부 유학생들과 함께 3선 개헌반대운동을 워싱턴 등지에서 소규모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1년 한국대통령선거 후 김대중은 미국으로 건너왔고, 유신헌법이 공표되자 그는 본격적인 유신반대운동을 위해 1973년 7월 미국에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미주본부’(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Reunification in North America)(약칭 ‘한민통’미주본부)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조직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한민통’ 미주본부를 결성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준비하던 중 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김대중의 납치로 위기에 빠진 ‘한민통’ 미주본부는 조직을 새로 다지고 새로운 헌장을 마련하기위해 1974년 11월 워싱턴 D.C.에서 모임을 갖고 2대 의장에 김재준을 선출했다.
김재준은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로서 197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다가 정부의 탄압이 심화되자, 1974년 초 캐나다의 토론토로 와 있었다. 그와 김재준의장과 같이한 ‘한민통’ 미주본부의 임원진으로는 명예의장에 김대중, 부의장에 이용운, 도원모, 고문에 김상돈, 전규홍, 안병국, 이재현, 송정율, 김성락, 최석남이 추대되었다. 또한 ‘한민통’은 전국적 조직임을 표방하고 출범하였기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미국의 주요도시에 조직을 두었는데, 1975년 당시의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상임위원과 임원직책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은 15인으로 김응찬, 이근팔(와싱턴), 김원국, 이승만(뉴욕), 송영창, 고종구, 김운하(로스앤젤레스), 강한수, 최명상(시카고), 이하전, 송선근(샌프란시스코), 김동건(세인트루이스), 김장호(보스톤), 전계상(씨아틀), 이상철(토론토), 정책기획연구실장(이재현), 징계위원장(안병국), 사무총장(강영채), 조직위원장(김응창), 재정위원장(이성호), 홍보위원장(정기용), 사무차장(이근팔) 등이다.
‘한민통’ 미주본부는 한국의 재야민주세력을 지원하고, 한국의 정치, 인권상황을 미국 조야에 알리는 작업, 그리고 지역순회 강연회와 집회 등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침으로서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사회운동단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는 가운데 ‘한민통’ 미주본부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전국적 단일조직을 지향하며 1977년 한국민주화연합운동(UM, 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으로 재편의 길을 밟는다.
한국민주화연합운동(UM)은 1977년 ‘한민통’미주본부 인사들이 주도하여 발족되었는데, 조직 재정비의 취지는 목표를 공유하는 다양한 조직을 통합하는 것과 민주역량의 분산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한민통’의 지도부는 다양한 여러 조직들, 예컨대 ‘조국민주회복 남가주국민회의’, ‘재미민주운동연합’ 등 남한의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정치세력과 관련이 깊은 단체들을 흡수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직의 전국적 재편작업을 위해 1977년 6월 김재준 등은 미주한인 사회단체대표자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한 세인트루이스(St. Louis市)회의에서 그러한 통합 안을 통과 시키고자 하였지만, 그에 대한 일부참가자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한민통‘ 미주본부에 참여했던 일부인사들이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동년 6월 미주민주운동의 이념적 보수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지녔던 임창영 등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진보적 입장임을 표방하며, ‘미주민주국민연합’(약칭 ‘미주민련’)을 출범시켰다. 이리하여 전국적 규모의 단일조직 대신 이제는 전국조직임을 표방하는 두 개의 단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미주민련’이 ‘한민통’의 전통을 이어받은 여타의 운동단체와 다른 점은 후자가 남북한 모두를 독재정부로 간주하고 우선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입장을 취했다면, 전자는 남한의 민주화가 진척되지 못하는 것은 분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따라서 민주화보다는 통일운동에 더 무게를 둬야한다고 보는 점이다. 따라서 ‘한민통’이나 후일 ‘한민통’을 이어받는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연합’(‘민통연합’)이 기독교와 보수정치세력에 친화력을 갖는 반공, 친미적인 성향으로 파악되었다면, ‘미주민련’은 진보, 반제, 친북적인 경향을 띠는 조직으로 대비되었다. 여하튼 ‘미주민련’의 출범은 미주한인사회에서 남한과 북한을 보는 시각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미주민련’은 북한과의 밀접한 관계와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통일을 위해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등 당시로는 급진적인 구호를 내걸어 동포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이제 미주한인사회에서도 운동의 우선순위를 놓고 남한의 운동권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운동세력이 두 개의 그룹으로 분열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즉 ‘선민주’냐 아니면 ‘선통일’이냐를 놓고 운동조직이 나뉜 것이다.
그 후 1979년 ‘한국민주화연합운동’은 남한에서 결성된 ‘민주주의 국민연합’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지부’(약칭 ‘국민연합’)로 바뀌었다.
‘국민연합’은 1983년에는 다시 한국에서 문익환목사가 중심이 되어 이끄는 ‘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에 대응하여 북미주의 민주화 운동세력을 통합하는 단체로 거듭나기 위해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신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연합’(약칭 ‘민통연합’)이 만들어졌다. ‘한민통’미주본부가 ‘국민연합’북미지부로, 그리고 다시 ‘민통연합’으로 바뀐 셈이다. ‘민통연합 1대와 2대 의장은 문동환목사, 3대는 김재준의 사위이자 캐나다 전체교회협의회(NCC) 의장이었던 이상철목사, 그리고 4대 의장은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된 김경재였다. 이러한 임원진의 구성은 ‘한민통’을 이어받은 조직들이 대체로 기독교 인사와 한국의 야당에 선이 닿아있는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음을 말해준다.
1970년대를 통하여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여하고, 민주화세력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민통연합’ 같은 단체는 과거부터 해 오던 활동을 198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지속했으나, 1986년 한국에서 6월 항쟁의 결과 유신 이래 폐지되었던 대통령직선제가 실시됨으로서 적어도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자, 1989년 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미주사회운동에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미주민련’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중노선과 전략의 부재, 동포사회의 보수적 분위기와 여타 어려움으로 인해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1987년 8월 해체되었다.
1970년대 이후 등장했던 민주화운동단체들은 90년대에 한국에서의 민주화가 진척됨에 따라 그 존재가차기 소멸되어 1989년 ‘민통연합’이 해체된 뒤 그를 이어가는 단체가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정치권과 관계를 맺고 있던 미주민주화운동단체에 관여했던 많은 인사들은 실제로 한국의 정치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1987년 대통령선거에 김대중과 김영삼이 출마하자,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귀국하여 선거운동과정에 관여했다. 그 중 일부는 한국정치권에 남아 1990년대에 김영삼, 김대중정권이 들어서자 국회, 정부, 청와대 등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양 김의 분열을 포함한 한국정치에 미주민주화운동은 직간접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