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현재 뉴욕시와 북부 뉴저지주 일대의 대도시 영역에 거주하는 한인 수는 대략 1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따라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일대에는 수많은 한인회가 존재한다. 뉴욕플러싱한인회(1980년 창립), 퀸즈중부한인회(1984년 창립), 브루클린한인회(1986년 창립), 맨하턴한인회(1999년 창립)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한인회들과 비교하면 뉴욕한인회는 1960년에 만들어져 가장 오랫동안 뉴욕지역의 한인사회를 대표해 온 단체이다.
한인들의 친목 도모와 권익 보호를 주된 목적으로 한다.
뉴욕에 한인회가 조직된 것은 1921년 당시 콜롬비아대학에 유학 중이던 조병욱 씨가 뉴욕 일원의 거류민과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만든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조병욱 씨가 조직했던 한인회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4년 「뉴욕한인교민단」이란 단체가 생겨 이를 이어갔다. 「뉴욕한인교민단」의 설립에는 안정수, 홍득수, 리봉수, 송세인, 신성구, 허정, 라진일 씨 등이 발기인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 단체 역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뉴욕총영사관 주도로 「뉴욕한인회」가 발족되어 뉴욕총영사 남궁염 씨가 한인회 회장을 맡아 동지회식의 운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6.25의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뉴욕 일원의 한인사회는 이렇다 할 단체 활동이 없이 지냈다.
오늘날의 「뉴욕한인회」의 출범은 1960년에 시작되었다. 즉 1960년 6월 12일(일요일)에 뉴욕한인회가 창립됨으로써 오늘날의 뉴욕한인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뉴욕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뉴욕한인회」 창립총회에는 약 40명의 한인들이 참석했는데, 이날 한인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준비해 온 「뉴욕한인회규칙」을 확정하고, 뉴욕한인회 초대회장(1960.6.12-1961.1.7)에 서상복 씨를 선출하였으며, 창립 첫 해 한인회 예산은 7백45달러10센트였다. 이후 제6대 이범선 회장의 제의로 「한국문화센터」가 설립되었고, 1966년 12월 23일 제1회 「코리언 나이트 볼」이 열림으로써 「뉴욕한인회회관 건립기금 모금」을 시작하여 4천여 달러를 모금하였다.
1973년 4월 10일에는 뉴욕주정부로부터 「비영리단체」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76년에는 회장 선거에 이의를 제기한 일부 인사들이 1976년 12월 4일 「뉴욕한인연합회(회장 김재현)」를 발족시켜 1년여 동안 교포사회가 양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잘 극복하고, 범교포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1983년 10월 27일 현재의 회관 건물을 구입하였다.
2003년에는 정보화시대에 발맞추어 뉴욕한인사회 종합 포털사이트인 뉴욕한인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ykorean.org)를 개설하였다.
뉴욕지역의 한인들에게 다양한 친목 프로그램과 실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다. 특히 뉴욕한인회에는 ‘정치력신장위원회’가 있는데, 2000년 뉴욕지역 방송인 WB11이 개고기를 빌미로 한인사회를 비하하는 방송을 내보내자 「뉴욕한인회」는 곧바로 ‘개고기 왜곡보도와 관련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두 차례에 걸친 사과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한인회가 사회운동단체로서의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2013년 현재 뉴욕한인회는 제32대 한창연 회장을 필두로 9명의 부회장, 그리고 복지, 교육, 다민족, 의료보건, 문화예술, 청년, 지역, 직능, 소기업 지원, 공연위원장으로 구성된 10명의 실행위원단을 두었고, 그 외에 특별위원회로 회관관리위원장, 회칙개정위원장과 법률자문위원 및 일반자문위원을 두고 있다.
한인회의 오랜 역사와 전국적 조직망을 바탕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한인사회와 잘 결합한다면 미국사회에서 동포사회 전체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단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