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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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건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이칭
이칭
한중국교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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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내용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바 있으며, 한중수교는 그 연장선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한중수교의 국제적 배경은 1989년 12월 미소 몰타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 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 9월 한소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수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중수교 과정을 보면,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 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새로운 교류를 시작했다. 또한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이후 1991년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 개최했는데, 이는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남북한 관계 개선의 추이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에는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12월 31일 비핵화공동선언 채택함으로써 남북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 이후 1992년 4월에 한국과 중국의 수교 협상이 개시되었다.

이와 같은 협상 노력의 결과로 1992년 8월 24일 한국 이상옥 외무장관과 중국 대표 첸지천[錢基琛] 외교부장은 북경 영빈관에서 한중 선린우호 협력관계 합의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원칙 등으로 6개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했다. 하지만 한중수교의 후속 조치로 중국이 요구한 한국과 대만의 단교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중간 국교 수립 이후 한중 교류는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교역 규모는 1992년 63억 8천만 달러에서 2012년 2206억 2000만 달러로 35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며, 사회적, 문화적 교류도 급격히 증가하여 중국에서도 ‘한류 열풍’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미동맹관계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한중관계는 불안정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중수교 20년』(공봉진 외, 한국학술정보, 2012)
『노태우 회고록』(노태우, 조선뉴스프레스, 2011)
집필자
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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