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 ()

연극
인물
해방 이후 북한에서 「항쟁의 노래」, 「백두산」, 「리순신장군」 등에 출연한 배우. 연극, 영화배우, 연극연출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2년
사망 연도
1961년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
정의
해방 이후 북한에서 「항쟁의 노래」, 「백두산」, 「리순신장군」 등에 출연한 배우. 연극, 영화배우, 연극연출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1월 11일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청양 군수를 지닌 황우정이고 형제는 누나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고, 손재주가 있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배재고보를 다니던 때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영화나 연극을 동경했다. 처음에는 유랑극단에서 황태철이라는 가명으로 무대장치를 거들면서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연극과의 첫 만남이다. 황철은 1935년 11월 서대문구 충정로에 동양극장이 문을 열며 연구생을 모집하자 입단했다. 이후 임선규 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철수 역을 맡으면서 자신의 명성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연기활동 중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하는데, 황철은 아내 이정순의 친구이자 선배 양백명의 아내인 문정복과 사랑에 빠졌다. 이후 정치상황의 급변에 따라 입지가 좁아지던 황철은 남측 대표로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협의회에 참가한 후 북한 국립극장 배우가 되었다. 한국전쟁기 전선위문공작대에서 예술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교육문화성 부상, 국립연극극장(현 북한의 국립연극단) 총장을 역임했으며, 많은 연극작품들에서 연기와 연출을 담당했다.

1930~40년대에는 「물새」, 「동학당」, 「춘향전」, 「홍길동전」, 「셔먼호」, 「김옥균전」 등 수십 편의 작품들에서 주역들을 담당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쟁의 노래」, 「백두산」, 「리순신장군」 등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다. 또한 「우리 마을」, 「설봉산」, 「밀림」, 「우리는 행복해요」 등을 연출하였으며, 소설 낭독에서도 독특한 기교를 보여주었다. 이외 인형극 「흥보와 놀보」(1965년 제3차 국제인형극축전에서 시상), 「혹뗀 이야기」 등의 대본도 창작하였으며 후배 연극인들을 지도했다. 그는 풍부한 성량, 세련된 화술, 표현력 있는 연기로 유명하며, 저서활동도 활발하여 「무대화술」, 「분장론」 등의 논문과 「새로운 연기창조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우와 기본훈련」, 「배우와 기교」 등의 평론, 「나의 종군수기」 등의 수기, 수필들도 집필했다. 북한의 첫 공훈배우, 인민배우였고, ‘조국 통일상’을 수여 받았다. 1961년 사망하여 묘는 애국열사능에 있다.

의의와 평가

황철은 절제된 연기와 풍부한 성량 때문에 근대 우리나라 연극사 최고의 배우로 현재까지 한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우리 연극사에서 남북한 소통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 인물연극사』1·2(유민영, 태학사, 2006)
「인민배우 황철의 연기훈련법: 화술훈련을 중심으로」(김정수, 『북한연구학회보』 16, 2012)
「한국연기 연기에 있어서 화술표현의 변천양태 연구: 190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김정수,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배우 황철의 무대화술 연구」(김성노,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배우 황철 연구」(엄국천,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집필자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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