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승담(昇潭)이다. 1943년 경기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제8기로 졸업했다. 1965년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75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해 다수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으며, 비정규전 전문가로 정평을 얻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대대장으로 가칠봉 전투, 풍암리 전투, 제1차 중공군 춘계공세 등에서 전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미국 동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1966년 11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7년 제1공수특전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공수특전여단장에 재직하며 공수부대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64회에 달하는 낙하산 점프를 실시해 장군 가운데 최고기록 보유자로도 유명하다.
제1공수특전여단장 사임 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장교보직처장으로 근무했으며, 1968년 육군 제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69년 2월에는 전자열 장군의 후임으로 제5대 주월한국군 비둘기부대 부대장으로 선임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72년부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재직했으며, 1974년 1월 육군 소장 신분으로 「대통령 긴급조치 2호」에 따라 설치된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1975년 2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제5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근무했으며, 수도경비사령관 퇴직 후 육군 수도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수도군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 신군부 주도의 12 · 12사건에 참여했으며, 1979년 12월부터 1980년 7월까지 제26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했다. 1980년 7월 황영시 차장의 후임으로 제29대 육군참모차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6월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81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2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83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같은해 3월부터 나희필 위원장의 후임으로 제6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위원 겸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86년 8월까지 재임했다.
1986년 8월 손수익 장관의 후임으로 제31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2월까지 재임했으며, 제6공화국 이후에는 모든 공직 활동을 중단했다. 저서로는 1949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81차례의 전투에서 실전경험을 기록한 『전투』(1985)가 있으며, 2011년 5월 10일 폐렴으로 사망했다.
상훈으로는 을지무공훈장(1970), 화랑무공훈장(1969), 3등보국훈장(1970), 월남국가 훈장(1970), 세네갈 지휘관훈장(1973), 자유중국 운휘훈장(198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