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세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0일 단성면과 신등면 주민들은 30리 거리의 두 면 장터를 돌며 만세시위를 벌이다 29명이 검거되자 3월 21일 다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신등면 출신의 박권세는 신등면과 단성면 주민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일본 헌병과 대치하다 헌병의 발포로 순국하였다.
경상남도 산청군에서는 1919년 3월 19일 신등면에서 시작되어 3월 20일 신등면 단계시장 만세시위, 3월 21일 단성면 성내시장 만세시위로 이어졌으며, 성내시장 만세시위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박권세는 산청군 신등면 출신이다. 신등면에서는 김상준(金相峻)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가하고 돌아와 부친 김영숙(金永淑) 등과 3월 19일 신등면 단계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중 헌병들의 기습으로 연행되었다. 한편, 정태륜(鄭泰侖) 등 3인은 3월 18일 밤 「통고문」, 「조선독립선언서」 등의 문서를 신등면과 도산면, 단성면 헌병 분견소 부근의 주요 지점에 붙여 분기(奮起)를 촉구하였다.
3월 20일 신등면 단계리 시장에서 600~7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약 30리[약 11.8㎞] 거리의 단성면 성내리로 와서 전날 구금한 김상준 등 5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밤 늦도록 대치하였다. 진주와 거창에서 급파된 일본 지원군에 의해 주도자 29명이 검거되고 해산되었다.
3월 21일은 성내리 장날이었다. 박권세는 아침 일찍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여 시장으로 나왔다. 신등면과 성내면 주민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 앞에서 전날 검거된 정태륜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과 대치하였다. 헌병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11명이 순국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박권세는 이때 일본 헌병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