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산청군 생비량면 출신으로 1919년 3월 23일 합천군 삼가면 장날 만세시위에 생비량면 주민들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삼가 시위는 3월 18일 400명의 1차 시위에 이어,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이 연합하여 2차로 1만 3,000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김기범은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의 총격으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김기범은 산청군 생비량면 사람으로, 산청군 대양면의 강홍렬(姜弘烈)이 서울의 고종 황제 국장(國葬)에 참여하였다가 입수한 독립선언서 한 부를 전달받았다.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3월 18일 400명의 1차 시위에 이어 3월 23일 합천군 쌍백면 · 가회면 · 삼가면, 산청군 생비량면 등이 연합하여 2차로 1만 3,000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개되었다. 김기범은 3월 23일 면 연합 삼가장터 만세시위가 계획될 때 생비량면 주민 동원 책임을 맡았다.
3월 23일 김기범은 수백 명의 생비량면 주민을 이끌고 농악을 울리며 삼가 장터에 합류하였다. 오후 3시 삼가의 정금당(正衿堂) 앞 단 위에 태극기를 세우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단 위에서 연설하는 주도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총격으로 사상자가 생기자 시위 군중은 격분하였다. 시위대가 경찰 주재소와 우편소로 몰려가 파괴하였다.
일본 경찰은 다시 군중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김기범은 시위대에 앞장서 나아가다 피격되어 쓰러졌다. 김기범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삼가 제방까지 기어갔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광복 이듬해 3월 1일 생비량면민들이 그의 묘 앞에 '순국열사 김기범의 묘'라는 순절비(殉節碑)를 세워 열사의 애국심을 추모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