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 · 대양 시위대의 합천 읍내 만세시위에서 17명이 구금되자, 3월 20일 구금자 구출을 위하여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양면에서는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합천경찰서로 돌입하였다. 김영기는 12인 결사대의 한 사람으로 시위대에 앞장서다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 읍내에서 전날 만세시위 때 구금된 인사를 구출하기 위해 500여 명의 시위대에 대양면 12인 결사대가 앞장서서 합천경찰서를 공격하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김영기는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대목리 출신이다. 1919년 3월 19일 합천 읍내에서 합천면과 대양면 주민 3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하다 시위 주도자 심재기(沈載祺) 등 17명이 연행되었다. 이에 김영기는 다시 재의거하기로 결의하고, 3월 20일 대양면과 합천면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양면 300여 명의 시위대는 합천으로 출발하기 전 마정(馬亭) 마을에 모여 김영기를 비롯한 이용선(李龍善), 손득용(孫得龍), 심맹권(沈孟權), 강시만(姜時晩) 등으로 12인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2인 결사대는 죽음을 같이 할 것을 서약하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읍내 광장으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김영기 등 12인 결사대는 대양 · 합천 시위대에 앞장서서 합천경찰서로 압박하여 들어갔다. 일본 경찰은 소방대와 함께 저지하였고, 시위대의 기세가 완강하자 총기를 발사하였다. 당시 시위대 4명은 현장에서 피살되고, 11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김영기는 이때 총격을 받아 절명하였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