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수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울산군 상등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울산군 언양 장날 만세시위는 언양 천도교인과 유림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김낙수는 시위 현장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시위는 일제의 발포에 투석전으로 맞서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4월 2일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 언양 장날, 천도교 언양교구 교인들과 유림(儒林) 인사들 주도로 1,0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낙수는 경상남도 울산군 상등면 출신이다. 천도교 언양교구장 김교경(金敎慶)은 경성의 고종 인산(因山)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등을 보내왔다. 이에 전임 교구장 최해규(崔海圭) · 최해선(崔海璇) 형제 등 천도교인 7명과 이무종(李武鍾), 이규인(李圭寅) 등 유림계 인사들이 4월 2일 언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거사 이틀 전인 3월 31일 최해규 · 최해선 형제와 곽해진(郭海鎭) 등 지도부 인사들이 경찰에 예비검속을 당하여 위기를 맞았으나 석방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들은 김낙수는 4월 2일 언양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낙수는 “조선인이면 누구라도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고무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일본 경찰이 발포로 대응하자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섰으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해산하였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6월 2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