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의 결과로 1921년 국제적 선교단체 협력기구인 국제선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세계선교대회가 주로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회원으로 가입해서 상호 협력을 논의했다면, 국제선교협의회는 비서구 기독교회의 기독교인들까지도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이런 차원에서 발족 이후 처음으로 개최한 대규모 에큐메니컬 세계대회로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대회는 1928년 3월 24일부터 시작되어 4월 8일 종료되었다. 당시 한국기독교계에서는 신흥우·양주삼·정인과·김활란·노블·마펫 등 6명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서구 국가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짝을 이루어 진행된 그동안의 기독교 선교를 반성하고,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로서 더 이상 서구인의 전유물이 아님을 확인하며, 기독교의 사회적·민중적 표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참석 대표 구성에서부터 이전의 국제선교대회와는 달랐는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오세아니아의 신생교회 대표들이 서구 교회 대표들과 거의 동수를 이루었다. 이 대회는 7개 분과로 나뉘어 타종교와의 대화, 종교교육, 선교국 기성교회와 피선교국 신생교회의 관계, 민족인종문제, 산업노동문제, 농촌문제, 국제적인 선교협력문제 등에 관한 주제를 놓고 광범위하게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교국과 피선교국 교회 간의 관계를 종속관계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수평적 관계로 새롭게 이해하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또 사회배경과 정신상 습관의 다름에 따라 개인이나 인종마다 각자의 견지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독교의 토착화, 타종교와의 대화 등을 가능케 하는 논의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이와 함께 선교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인종문제·산업문제·농촌문제 등에 대한 기독교의 사명과 입장을 정립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교회기관이 공동 협력하여 조사와 연구, 토론과 지침 설정, 여론조성과 교육, 그리고 실제사업에 걸쳐 연대활동을 펼쳐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특별히 농촌분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사례발표로 한국농촌에서 관한 조사보고서인 E. S 브루너의 “Rural Korea”가 토론 준비 자료로 사전에 회람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참석자 중 김활란, 신흥우 등은 귀국하는 길에 농촌 근대화로 소문난 덴마크를 방문해 2주일 동안 그 실태를 조사하였고, 귀국 직후 이들을 중심으로 YMCA나 YWCA의 주요 사업은 농촌사업으로 정해졌다. 또한 직접 예루살렘을 다녀온 김활란은 『청년』 1928년 11월호에 게재한 「예루살렘대회와 今後 기독교」이라는 글을 통해 ‘신앙생활의 사회화와 실제화’라는 시대적 명제(命題)를 재확인하였고, 기독교를 민주화하고 사회화, 실제화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흐름을 타고 YMCA, YWCA 외에 장로회, 감리회 등 교단 내부에도 농촌사업을 위한 농촌부(農村部)가 설치된 것을 비롯하여, 예루살렘대회의 결의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사회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보수적인 장로교회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더 나아가 장로교는 1933년 배민수 목사가 미국에서 확보한 기금 7천 원으로 농촌부를 상설기구로 하고, 그를 총무로 임명하여 농촌운동을 조직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선교대회의 참석이 한국기독교계에 미친영향은여기서 한국문제를 논의했거나 어떤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회의에 참석했던 한국교회 대표들의 시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것이 한국기독교계에 영향을 미쳤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