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당시 전도사인 김교철(金敎哲)은 수촌교회 출신으로, 기독교인인 안종후 · 홍원식과 협의한 후 4월 3~4일 수촌리 교인과 주민을 인솔하여 깃발을 앞세우고 장안면(長安面)에서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 시위에는 2천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으며, 우정면(雨汀面) 주민들과 합세한 수촌리 주민들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이어 화수리(花樹里) 주재소에 쇄도하여 일본 경찰인 가와바타[川端豊太郞] 1명을 타살하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가 수촌리 청년들이라고 생각한 일제는 4월 15일 새벽 보복에 나서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를 전소시켰고, 주민들은 총검에 희생되었다. 그리고 김교철 · 김덕근(金德根) · 김덕삼(金德三) · 김명우(金明友) · 김여근(金汝根) · 김응식(金應植) · 김응오(金應五) · 김종학(金種學) · 김황운(金黃雲) · 김흥삼(金興三) · 백순익(白順益) · 이순모(李順模) · 정순영(鄭淳榮) · 차인범(車仁範) 등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김교철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수촌리와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참상은 당시 현장을 방문한 선교사 스코필드(F. W. Scofield)의 언론 활동과 헨리 정(Henry Chung)의 『The Case of Korea(1921)』 등을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일제를 궁지에 몰아 넣었으며, 일제의 통치 정책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방화로 전소된 예배당은 1922년 4월 아펜젤러(H. D. Appenzeller)와 노블(W. A. Noble)의 지원을 받아 초가 8칸으로 신축되었으며, 1932년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되었다. 1953년 3월에는 목조 예배당(20평)을 신축했고, 1965년 6월 창립 60주년을 맞아 다시 양옥 예배당(57평)을 신축하였다. 1962년 3월에는 스코필드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사은회가 수촌교회에서 개최되었다.
현재 수촌교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조암지방에 소속되어 있다. 복원된 옛 예배당은 1986년 5월 20일 향토 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전면 7.33m, 측면 4.93m이며, 내부는 마루와 방 2개, 부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촌교회는 3·1운동 당시 교인들이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가 일제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은 대표적인 교회로, 폐허가 된 마을과 전소된 교회, 비통에 빠진 교인들의 사진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