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지역의 장안면과 우정면의 3 · 1운동은 백낙렬(白樂烈), 김성열, 안종후(安鍾厚)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백낙렬과 김성열은 천도교 책임자로서 천도교 조직을 통해 수원의 전 계층을 일원적으로 조직화하였고, 안종후는 기독교 측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천도교와 합세하여 3 · 1운동을 전개하였다.
백낙렬, 안종후 등은 서울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직접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당시 수원의 만세시위는 4월 3일과 4월 5일 발안장을 이용하여 가장 고조되었는데, 이날 시위로 안종후를 비롯해 다수가 수비대에 붙잡혀 주재소에서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는 지속적으로 탄압을 가하였고,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4월 15일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사사카[佐板] 등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들어와 3 · 1운동의 주동자로 파악된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30여 명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넣고 방화와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안종후도 불에 타서 순국하였다.
일제의 만행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에 의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가 작성되어 본국에 알려졌다. 또한, 일부 양식 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와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 등은 학살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