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순은 1919년 4월 5일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발안 장날,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다가 일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부장이 돌에 맞아 죽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보복 작전을 펼쳐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서 마을 주민을 학살하고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3 · 1운동 당시 이곳에서 거주하였던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물이다. 1894년 3월 24일 출생하여 1919년 4월 15일 사망하였다.
수원의 3 · 1운동이 조직적인 준비를 거쳐 본격적으로 실행된 것은 1919년 3월 25일의 만세운동이다. 이날 민중들은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3월 31일에는 향남면 발안 장날을 기하여 1,000여 명의 민중들이 장터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3일에는 만세시위운동이 더욱 확산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연합으로 실행되었고, 민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식민 행정소인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 주재소로 몰려갔다.
당시 화수 주재소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는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아 4명을 살해하였고, 도망가던 중 민중들에게 포위되어 처단되었다. 이 우정면과 장안면의 3 · 1운동은 천도교 조직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었다. 참여자 수는 약 2,500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극악한 폭력과 고문으로 조선인을 탄압하였다.
안봉순(安鳳淳)은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安珍淳) · 김덕용(金德用) · 안상용(安相容) · 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날 시위 군중은 1,000명이 넘었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은 일경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격노한 군중은 일경과 투석전을 벌였고,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돌에 맞아 죽었다. 수원 지역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수원 전역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진압작전에 들어갔다.
4월 15일 오후 2시, 일본인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20명가량의 군경이 제암리에 들이닥쳐 만세운동 주동자를 비롯한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어 가둬 놓고 집중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안봉순은 그의 아들 안유순(安有淳)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제암리 학살 당시 희생자 수는 정확하지는 않은데, 한 연구에 의하면 천도교인 25명, 기독교인 12명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