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96년 1월 4일 안종보(安鍾甫)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 때 교회에 갇혀 사망하였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는 조선 후기 이래 순흥안씨(順興安氏)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집성촌으로 3 · 1운동 당시 전체 33가구 중 2가구를 제외하고 모두 순흥안씨였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제암리 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geller)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한 안종후(安鍾厚)가 1905년 8월 5일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도 제암리 교회의 속장(屬長)으로 활동하였다.
수원 지역의 3 · 1운동은 1919년 3월 중순부터 준비 · 계획되어,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날의 만세시위와 4월 3일 우정면 화수리와 장안면 수촌리의 연합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안진순(安珍淳)은 4월 5일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봉순(安鳳淳), 김덕용(金德用), 안상용(安相鎔), 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일제는 향남면 발안 지역에 주둔하며, 검거반을 편성하여 수촌리를 급습 · 방화하였으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203명의 마을 주민을 검거하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79연대 소속의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11명의 군인과 일본인 순사 1명, 조선인 순사보 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왔다. 제암리에 들어온 아리타는 마을의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교회 주변과 지붕에 석유를 뿌리고 출입구를 막고 불을 질러 교회 안에 있던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탈출을 시도하거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2명도 현장에서 죽였으며,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이때 그도 교회 안에 갇혀 있다가 순국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 장례를 지낼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며, 4월 17일 사건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스코필드(F. W. Schofield)[한국명 石好必, 石虎弼]가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 인근의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1982년 9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안진순의 미망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학살 현장이 확인되었으며, 발굴 작업을 통해 23위의 유해가 확인되었다. 경기도에서는 1982년 9월 29일 사건 시간인 오후 2시에 합동장례식을 거행한 후, 제암리 교회 뒤편에 마련한 합동묘지에 안장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