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쾌복(權快福)은 1921년 2월 2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명(仁同面) 시미동(侍美洞,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권상근(權相瑾)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백인(百忍)이다.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을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신장은 163㎝였으며, 보통 정도의 체격이었다고 한다. 어려서 밀양(密陽)으로 이주하여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 7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왜관철교 복선화 작업에 동원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충돌이 있었고, 이를 일방적으로 부당하게 처리한 일본인 교사들을 구타한 왜관사건(倭館事件)이 발생하자 배학보(裵鶴甫) · 조강제(趙崗濟) · 최영백(崔榮百) 등과 함께 왜관심상소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사건의 진상과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교내에서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백의단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관한 서적과 잡지를 읽고 토론하는 등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던 비밀결사이다.
1941년 2월 15일에는 저녁 유흥수와 이주호의 하숙집에서 배학보 · 조강제 · 이홍빈 · 문홍의 등과 함께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당은 산하에 총무부 · 학술부 · 문예부 · 연구부 · 경기부 등의 부서를 두고 학생들에 각 분야에서 수재(秀才) 교육을 시켜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당의 명칭은, 영웅은 다색(茶色)을 좋아하며, 혁(革)은 혁명을 의미하는 뜻에서 다혁당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다혁당이 결성되자 권쾌복은 학생들의 추대로 당수(黨首)가 되어 예술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학내에서 차별을 없애는 방법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이 결성된 것은 백의단이 결성된 후에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선배들이 졸업하게 되자, 백의단을 해체하고 이미 결성되었던 비밀결사 문예부 및 연구회와 조직을 통합해 그 역량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훈도(訓導)로 활동하던 정현(鄭鉉)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수업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집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독서회 모임인 윤독회(輪讀會)에서 발간한 잡지 『반딧불』이 발각되면서 당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그해 11월까지 학부형 교사 등을 포함해 300여 명의 관련자가 검거되고 이 가운데 3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는 5명이 징역 5년, 2명이 징역 3년, 27명이 징역 2년 6월 등의 형을 선고받았으며, 투옥된 학생 중 박재민 · 강두안 · 박찬웅 · 정세파 · 서진구 등은 극심한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이때 권쾌복도 체포되어 대전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2년여 동안 미결수로 복역하면서 경찰의 취조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44년 3월 23일 형이 확정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8 · 15광복이 되자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1996년 제14대 광복회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