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혁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의병장.
이칭
이명
손태옥(孫太玉), 손태옥(孫泰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 4월 22일
사망 연도
1946년 4월 27일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92)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손기혁은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하동군 가종면(지금의 옥종면) 출신의 의병장으로, 김용이 등 다수의 청년과 의병진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2년 형을 받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의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의병장.
가계 및 인적 사항

손기혁(孫琪赫)은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가종면(加宗面, 지금의 옥종면)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손태옥(孫太玉, 孫泰玉)이고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부인의 이름은 조사수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부친 손경인(孫慶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행도사(行都使)를 지냈으며, 모친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주요 활동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高宗)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가종면 면장을 지내다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손기혁은 1908년 6월 김용이(金龍伊) 등과 함께 총검으로 무장하고 의병진을 조직하였다.

의병진을 조직한 초기에는 주로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다. 가종면 월횡동(月橫洞)에서 정태진(鄭泰鎭)로부터 8원(圓)의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가종면 동월동(東月洞)에서는 이진원(李辰元)으로부터 엽전 20냥과 명주 세 필 등을 군자금으로 받았다.

1910년에는 가종면 정수리(正水里) 옥산재(玉山齋)에 옥진학교(玉振學校)가 설립되자 2원의 성금을 기부하는 등 한말(韓末)의 교육 운동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후 손기혁은 일제 경찰에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15년 5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고 6월에 대구복심법원에 항고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감형되어 징역 8년 5월 27일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한약방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8 · 15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三壯面) 덕교리(德橋里)로 옮겨 와 1946년 4월 27일 동생 집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재상 편, 『하동의 독립운동사』(악양면청년회, 2000)
추경화 편, 『하동 독립유공자공훈록』(하동문화원, 2000)
『독립유공자공훈록』 10(국가보훈처, 1993)

판결문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5. 6. 1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