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식(金元植)은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한 이후 1907년 7월을 전후로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군사를 모아 활동을 전개한 항일 의병장이다. 가계 및 인적 사항 등에 관하여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김원식 의진은 주로 강원도 춘천 이북의 평강(平康) · 인제(麟蹄) · 양구(楊口) · 김화(金化) · 금성(金城) · 회양(淮陽)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으며, 화승총(火繩銃)과 서양 총으로 무장한 20여 명의 소부대를 지휘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전개하였다. 주로 강원도 북부의 험악한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야간과 새벽에 기습전을 전개하거나 헌병 주재소를 파괴하고 공문서를 불태웠으며, 전선(電線)을 절단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해 일제로부터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김원식 의진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에서 일어나 강원도 북부의 금강산 지역까지 북상한 이강년(李康年) 의병과도 합세하여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식의 부대는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출몰하여 일본군 수비대에 피해를 입히는 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6월 6일 김원식 의진은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강산 이북의 흡곡군(歙谷郡)에 돌입하여 헌병 주재소를 파괴하고 문서를 소각하였으며, 관리의 의복을 불태웠다. 또한, 일본어 학교를 불태웠으며, 조선인 순검(巡檢) 세 명을 붙잡아 회양 방면으로 이동 중에 친일 순사 김응국과 이응섭을 처형하였다.
같은 해 6월 10일에는 강원도 양구군 상동면(上東面)에 나타나 일진회 회원 1명과 담배 행상(行商)을 가장한 밀정(密偵) 1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남한폭도 대토벌작전(南韓暴徒 大討伐作戰)이 강화되는 가운데 1908년 6월 26일 강원도 금성군 동쪽의 과반리(過半里)에서 일본군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일제는 김원식이 전사하자 금강산 부근에서 활동하던 이강년 이하 약 1,000여 명의 토벌하였으며, 김원식 등 괴수(魁帥)가 죽자 점차 평온해졌다고 자평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