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길(金相吉)은 1926년 12월 29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南山洞,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김성연(金成淵)과 어머니 서명숙(徐命淑) 사이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충의공파(忠毅公派)이고 호는 민곡(旼谷)이다.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9년 부친의 권유로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부친이 대구의 곡물주식회사 전무로 근무하였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 이상호(李相虎) · 서상교(徐尙敎) 등과 함께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아침 조례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는 것과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 45도 각도 이상 머리를 숙여 절해야 하는 것, 우리의 태극기가 있는데도 일본 국기에 절해야 하는 등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민족의식을 공유하였다.
1942년 4월 20일 이상호에 집에 모여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太極團)을 결성하였으며, 관방국장에 선임되었다. 단장은 이상호가 맡았으며, 체육국장은 서상교가 맡았다. 관방은 태극단의 재정과 문서 취급 및 행정 전반을 담당하는 부서를 의미하였다. 회의 명칭을 태극단이라고 한 것은 한말 이래로 사용되어 온 태극기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T · K · D라는 약칭을 사용하였다.
동지들은 김정진(金正鎭) · 이준윤(李浚允) · 이원현(李元鉉) · 윤삼룡(尹三龍) · 이태원(李兌遠) · 최두환(崔斗煥) 등을 포섭하였는데, 윤삼룡은 대구공업학교, 최두삼은 경북중학교 학생이었다. 회원이 20여 명으로 늘자 5월 9일 대구 비파산(琵琶山)에 모여 결단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참석 인원이 적어 6월 6일에 팔공산에 모여 다시 결단식을 행하는 한편, 조직 체계를 정비하였다. 산하 조직으로 관방국(官房局) · 체육국(體育局) · 과학국(科學局) · 군사부(軍事部) · 항공부(航空部) · 등산부(登山部) 등 10여 개의 부서를 두었는데, 특히 건아대(健兒隊)를 두어 중학교 1 · 2학년생과 보통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단원으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때 김상길은 관방국장 외에 군사부장의 직책도 담당하였다.
태극단은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우선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 단련과 군사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3년 5월 말 태극단 결성식을 준비하던 중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으며, 그는 이상호 · 서상길 등과 함께 수업 도중 교실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총 26명의 단원이 체포되었는데, 이 가운데 17명이 불기소 처분되었으며, 이태원 · 정환진 · 정광해 등 3인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김상길 · 이상호 등 6명이 단기 2년에서 장기 10년의 형량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김상길은 취조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함께 체포되었던 이준윤(李浚允)은 고문 휴유증으로 순국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 ·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해군병학교(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며, 1963년에 해군본부 작전참모부장, 1969년에 해군사관학교 교장, 1971년에 해군 함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72년 소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80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고, 2018년 4월 22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