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신민서사」는 1937년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맹세이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발표된 것이자 제3차 조선교육령의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중심의 식민교육책과 연계되었다. 「황국신민서사」의 암송과 제창은 일본의 관제 미신인 신사 참배와 연동되는 가운데 충량한 황국신민의 길을 걷도록 하는 기만책이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조선총독부는 1937년 10월 2일에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였다.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맹세이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발표된 것으로, 총독부는 각급 학교에 일본의 관제미신인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조회와 학교의식에서 제창하도록 하였다.
아동용에서는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는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성인용에서는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공고히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는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개인적 신체는 이처럼 천황과 일제에 대한 충군애국을 바치는 사회적 신체로 동원되고 소비되었다.
「황국신민서사」는 단순히 암송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각 교실 정면에 서약 액자를 걸어 교실을 출입할 때마다 경례를 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의 서약 실천 일지를 통해 그 맹세의 진심을 보여주기를 확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학교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는 「황국신민서사」를 족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외우게 했고, 마을마다 애국반을 만들어 반상회를 자주 열고 이 서사를 항상 제창하도록 하였다. 각 관공서와 회사 등에서도 조회 및 5인 이상의 회합 시에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1938년 1월부터는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하지 않는 신문과 잡지는 불온문서 취급을 하였고, 1939년 11월에는 조선교육회 주도로 조선 전체 아동, 학생과 교육관계자로부터 모금을 실시하여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경내에 황국신민서사의 탑[皇國臣民誓詞之柱]을 세웠다. 라디오 체조의 형식으로 황국신민체조가 전략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식민 권력은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맹세가 자칫 공허하고 무력해질 것을 우려하여 「황국신민서사」를 여러 실물과 구조물의 형태로, 구체적인 회로 및 행동 지침을 통해 재구성하여 강요, 강제하였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의 교육은 이처럼 조선인 자체를 불경을 저지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한 상태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식민권력의 한층 더해가는 초조감과 불안심리는 식민교육이 성공할 수 없는 기획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