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김동필(金東弼) · 경현수(慶賢洙) · 이봉학(李鳳學) · 강원형(姜遠馨) · 이인순(李麟淳) · 유동희(柳東熙) · 이상린(李相麟) 등과 함께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호남의 유생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을사오적의 처단을 도모하기도 하였으며, 평안북도로 이거하여 활동하던 중 민영환(閔泳煥)의 자결 소식을 듣고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혈죽부(血竹賦)」라는 시를 지어 기고하였다.
1907년 10월 이인영 의병장이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은찬(李殷瓚) · 이구재(李九載) 등의 추대로 관동창의대(關東倡義隊) 대장에 추대되자 강윤희는 부장(副將)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군이 전개한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강윤희는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강원도 양구군과 화천군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에 맞서 산악전을 전개하였다. 1909년 5월 11일 화천군 남면(南面) 완강리(莞江里) 산중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으며, 경성재판소 춘천지부에서 내란죄 등의 혐의로 교수형을 받았으며, 1909년 11월 30일 형이 집행되어 춘천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묘소는 가평군 청평면(淸平面) 대성리 오리동에 있으며. 강윤희의 활동을 기록한 묘비가 조성되어 있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