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3 · 1운동이 발발하자 경성에 인접해 있던 수원군의 각 지역은 교단 조직을 통해 3 · 1운동의 분위기를 파악했던 인물이나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인사들을 통해 운동의 소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에 3월 31일에는 향남면의 발안(發安) 장날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며, 4월 3일의 우정면 화수리와 장안면 수촌리의 시위에서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4월 5일에는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鎔), 안봉순(安鳳淳), 김덕용(金德用), 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 일제는 헌병대를 중심으로 검거반을 편성하였으며, 4월 5일6일에는 발안에 주둔하며 수촌리를 습격하여 마을을 불태웠다. 2차 검거반도 4월 1112일까지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204명의 주민을 검거하였다. 검거반이 철수한 후에는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군 병력이 발안 지역에 파견되어 분위기를 더욱 삼엄하게 하였다.
4월 15일 오후, 아리타는 11명의 군인과 일본인 순사 1명, 조선인 순사보 1명을 거느리고 제암리로 출동하여 마을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후, 교회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교회 안에 있던 남자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일본군은 탈출을 시도하거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2명도 현장에서 죽였으며,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방화하였다. 안필순(安弼淳)은 이때 교회 안에 갇혀 있다가 순국하였다.
4월 17일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마을 주민들을 대신해 불에 탄 시신을 수습하여 마을 인근의 공동묘지에 묻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