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성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향남면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1919년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은 크게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일제는 이를 억압하고자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나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강태성은 이때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국하였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강태성(姜泰成)이다.
1919년 수원에서는 3월 28일 송산면,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 4월 5일 향남면에서 만세운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강태성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 안진순(安珍淳), 김덕용(金德用)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날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 일대의 만세시위는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증파하여 이 일대 촌락과 한국인에 대한 방화, 체포, 고문 등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제 수비대는 만세운동 관련자 검거에 혈안이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한 10여 명의 보병이 제암리에 나타났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고 속이고, 20여 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도록 지시하였다.
상황을 모르는 주민들은 군경의 지시에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어 부하들을 시켜 불을 놓아 교회를 태워버렸다. 이러한 만행으로 23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 희생되었다.
강태성은 당시 19세였던 부인 김씨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강태성의 유해는 군경의 방해로 가족조차 접근할 수 없었으나,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겨우 안장할 수 있었다. 스코필드는 이 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의 실상을 폭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