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이 확산되며 격렬해지자 일본 군인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난 일제수비대는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때 김덕용도 주민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1901년 1월 6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 곡구래미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청년들과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수원에서는 3월 28일 송산면,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 4월 5일 향남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김덕용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 안진순(安珍淳), 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날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분노한 시위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은 일본인 경찰 2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일어났다.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증파하여 이 일대 촌락과 한국인에 대한 방화, 체포, 고문 등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제수비대는 만세운동 관련자 검거에 혈안이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한 1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고 속이고 23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상황을 모르는 주민들은 군경의 지시에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사격을 명령하는 동시에 불을 놓아 교회를 태워버렸다.
이러한 만행으로 23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 희생되었다. 이때 김덕용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러나 유해는 군경의 방해로 가족조차 접근할 수 없었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겨우 안장하였다. 스코필드는 이 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의 실상을 폭로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