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제암리 삼일운동 순국 유적(華城 堤岩里 三一運動 殉國 遺蹟)은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화성 제암리 지역민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다. 1982년 사건 발생 주변을 발굴 조사하여 수습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교회 뒤편 합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1982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82년 9월 문화공보부의 민족수난현장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 사건의 목격자이며 유일한 미망인인 전동례의 증언과 최응식의 도움을 받아 이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다이쇼8년명〔大正八年銘〕 1전짜리 동전, 호주머니칼, 인장통, 조끼단추, 마고자단추, 램프걸이, 구부러진 못, 불탄 숯, 화염병으로 사용되었던 기린맥주병의 조각 등과 함께 여덟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 유골들은 유족의 입회 하에 모두 대형관에 입관되어 1982년 9월 29일 사건 시간인 오후 2시에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제암교회 뒤편에 마련된 합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사강리에서는 3월 26일과 28일에, 발안장에서는 3월 31일에 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를 해산시키고자 일본 순사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였으나 시위대를 자극하여 다수의 지역민들을 불러들였다.
시위는 고조되었고 4월 1일 횃불 만세 시위, 4월 3일 우정과 장안 일대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천안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 79연대를 화성으로 보내 이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군은 지역 일본 경찰에게 상황을 보고받았다. 15일 제암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강연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와 천도교 남자 신자 20여 명을 교회당에 강제로 모이게 하였다.
돌연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칼로 학살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때 불속에서 뛰쳐 나오거나 길에 나왔다가 달아나는 사람에 대해 발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으로 교회당 안에서 22명, 밖에서 6명 등 모두 28명이 살해되었다.
일본군의 학살 행위는 인근 수촌리에서 벌어진 또다른 일제의 탄압 상황을 확인하려고 발안을 방문하였던 미국인 일행이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당시 부대를 지휘하였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전시 상황으로 판단해 그에 적합한 임무 수행을 했다고 진술하였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주모자를 박멸하고 그 소굴을 없애 이들의 희망을 근절시켜야 했기에 필요한 조치였다고 주장하였다. 재판부는 아리타 도시오가 일부 임무의 범위를 벗어나긴 했으나 전시에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다고 판단하고 무죄를 선고하였다.
화성 제암리 삼일운동 희생자들은 순국선열로 추서(追敍)되었고, 교회 주변은 1982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묘지의 남쪽에는 제암교회에 붙은 기념관이 있는데, 이 기념관 벽면에는 그날의 참상을 그린 3폭의 기록화와 외국 언론사들의 보도 내용이 있고, 유해 발굴 조사 당시의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내부 진열대에는 유해 발굴 조사 당시 출토되었던 유물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그날의 참상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교회 입구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